복음이 온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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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 161603–1783

책으로 먼저 온 복음

선교사가 한 사람도 없던 땅에, 복음은 어떻게 먼저 들어왔나?

  • 조선은 선교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북경에서 들어온 «책»을 통해 그리스도교를 처음 만났다.
  • 사신을 따라 들어온 서양 서적은 처음에는 서양의 학문(서학)으로 읽혔다.
  • 그러나 18세기 후반, 그 책을 «학문이 아니라 믿음»으로 읽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흐름

무슨 일이 있었나

조선은 해마다 북경에 사신을 보냈다. 사신단은 책을 사 왔고, 그 짐 속에 예수회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쓴 책이 섞여 들어왔다.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가 그중 하나였다.

1614년 이수광은 『지봉유설』에 서양 나라와 『천주실의』의 내용을 소개했다. 그는 신자가 아니었고, 이 책을 «외국의 기이한 학설»로 다뤘다. 그러나 조선의 글 읽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교의 존재를 처음 활자로 만난 자리가 여기다.

1631년 진주사 정두원은 등주에서 예수회 선교사 로드리게스를 만나 자명종·천리경·화포와 함께 서양 서적을 받아 왔다. 병자호란 뒤 심양과 북경에 볼모로 잡혀 있던 소현세자는 1644년 북경에서 아담 샬을 만났고, 이듬해 귀국하며 서양 서적과 지구의를 가져왔다. 그는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났고 그가 가져온 것들은 이어지지 못했다.

백 년이 지난 18세기 후반, 사정이 달라졌다. 권철신·정약전·이벽을 비롯한 남인 계열 젊은 학자들이 경기도의 절에 모여 서학 서적을 읽었다. 그들에게 그것은 더 이상 «서양의 기술»이 아니었다. 그리고 1783년, 이승훈이 아버지를 따라 북경으로 떠났다.

개념

먼저 정의하고 갑니다

서학西學
조선에서 서양의 학문과 종교를 함께 이르던 말. 천문·역법·수학 같은 «서기(西器)»와 천주교 교리인 «서교(西敎)»가 한 낱말 안에 묶여 있었고, 이 뒤섞임이 조선 지식인의 수용과 조정의 탄압을 함께 설명한다.
보유론補儒論
마테오 리치가 『천주실의』에서 편 방법. 유교를 부정하지 않고 «유교를 보완한다»는 자리에 그리스도교를 놓았다. 조선 남인 학자들이 이 책을 거부감 없이 읽은 이유이자, 뒤에 제사 문제로 충돌했을 때 그 논리가 무너진 지점이기도 하다.
연행사燕行使
청의 수도 연경(북경)에 가던 조선 사신단. 해마다 오가는 이 행렬이 서적·기기·정보가 들어오는 사실상 유일한 통로였다. 조선의 서학 수용을 «사행(使行) 지식»이라 부르는 까닭이다.

사건

그때 일어난 일

  1. 1614전해짐

    『지봉유설』에 실린 『천주실의』

    이수광이 백과사전식 저술 『지봉유설』에 유럽 여러 나라와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소개했다. 조선의 문헌이 그리스도교를 다룬 이른 기록으로 꼽힌다.

    출처 · 이수광, 『지봉유설』(1614)
  2. 1631전해짐

    정두원이 가져온 서양 문물

    명에 사신으로 간 정두원이 등주에서 예수회 선교사 로드리게스를 만나 자명종·천리경·화포·서양 서적을 받아 돌아왔다.

    출처 · 『인조실록』
  3. 1645전해짐

    소현세자와 아담 샬

    북경에 머물던 소현세자가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과 교류했고, 귀국하며 서양 서적과 천구의 등을 가져왔다. 그러나 귀국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나 이 만남은 이어지지 못했다.

    출처 · 『인조실록』, 아담 샬의 기록
  4. 1777전해짐

    젊은 학자들의 강학

    권철신을 중심으로 한 남인 학자들이 경기도의 절에 모여 서학 서적을 함께 읽었다. 학문으로 시작된 독서가 신앙의 물음으로 넘어간 자리로 평가된다.

    출처 · 정약용 「선중씨묘지명」 등
  5. 1783전해짐

    이승훈, 북경으로

    동지사 서장관이 된 아버지를 따라 이승훈이 북경으로 떠났다. 조선 신앙 공동체의 부탁을 안고 간 걸음이었다.

사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이수광

1563–1628

문신·『지봉유설』 저자

세 차례 북경에 다녀오며 서양 서적과 세계 지리를 접했고, 그것을 조선 독자에게 정리해 소개했다.

한계와 다른 평가

그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니었고 『천주실의』를 «기이한 학설»로 다뤘다. 그를 «한국 기독교의 시작»으로 부르는 것은 지나치다. 그가 한 일은 문을 연 것이 아니라 문이 있다는 사실을 적어 둔 것이다.

소현세자

1612–1645

조선의 세자, 북경 볼모

청에 볼모로 잡혀 있던 8년 동안 서양 문물과 아담 샬을 만났고, 귀국길에 서적과 천문 기구를 가져왔다.

한계와 다른 평가

그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였다는 기록은 없다. 세자가 살아 조선이 일찍 서양을 받아들였을 것이라는 이야기는 후대의 가정이지 사료가 말하는 바가 아니다.

이벽

1754–1785

초기 신앙 공동체의 지도자

서학 서적을 신앙으로 읽고 동료들을 이끌었으며, 이승훈에게 북경에서 세례를 받아 오도록 권했다.

한계와 다른 평가

집안의 극심한 반대 속에서 세상을 떠났고, 그 마지막에 신앙을 지켰는지를 두고 기록이 엇갈린다.

그때의 기록

남아 있는 자료

『지봉유설』은 「제국부(諸國部)」에서 유럽 여러 나라를 다루며 마테오 리치와 그의 저술을 언급한다. 조선의 지식인이 그리스도교를 활자로 만난 통로가 어디였는지 보여 주는 기록이다.

이수광, 『지봉유설』 · 1614

확인

잘못 알려진 이야기

이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서양 선교사가 들어와 시작했다.

확인해 보면

천주교는 선교사가 오기 전에 «책»으로 들어와 조선 사람 스스로 공동체를 이루었고, 개신교도 선교사 입국 전에 만주와 일본에서 번역된 한글 성경이 먼저 들어왔다. 두 번 다 사람보다 글이 먼저였다.

연구사

학계는 이렇게 읽어 왔습니다

쟁점

조선의 서학 수용을 «학문»으로 볼 것인가 «신앙»으로 볼 것인가

학문적 관심이 먼저였다는 쪽

이수광·정두원 단계는 천문·역법·기기에 대한 실용적 관심이었고, 신앙적 수용은 18세기 후반에야 나타난다고 본다. 실학 연구 전통에서 주로 이 자리를 잡는다.

처음부터 종교적 물음이 있었다는 쪽

『천주실의』가 다루는 것은 기기가 아니라 상제(上帝)와 영혼이며,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이 곧바로 신앙 공동체를 만든 사실이 그 증거라고 본다.

지금 대체로 합의된 것두 흐름이 겹쳐 있었다는 것이 오늘의 대체적 이해다. 다만 «언제부터 신앙으로 읽혔는가»의 시점 판단은 여전히 갈린다.

오늘

나에게 묻는 질문

아무도 전해 주지 않은 진리를 책 한 권으로 붙든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무엇을 읽고, 그 읽은 것을 어디까지 살아 내고 있나?

더 읽을 것

이 시대를 더 파려면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한국 기독교의 역사』 I표준 통사. 이 시대는 1권 서장에서 다룬다.
  • 조광『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서학 수용의 사회적 배경
  • 이만열『한국기독교사특강』통사적 얼개를 짧게 잡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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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문제

  1. 1조선에 그리스도교가 처음 들어온 통로는 무엇이었나?

  2. 2『지봉유설』에서 『천주실의』를 소개한 사람은?

  3. 3소현세자가 북경에서 만난 예수회 선교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