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세운 교회, 그리고 박해
선교사 없이 시작된 신앙은 왜 백 년 가까이 피를 흘려야 했나?
-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오면서 조선 천주교회가 시작됐다 — 선교사가 세운 것이 아니라 조선 사람이 스스로 세운 교회였다.
- 제사 문제로 조정과 정면충돌했고, 신유·기해·병오·병인 네 차례의 큰 박해를 겪었다.
- 개신교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이 땅에는 신앙을 지키다 죽은 사람이 수천 명 있었다.
흐름
무슨 일이 있었나
1784년 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왔다. 그는 동료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서울 명례방의 집에서 모임이 시작됐다. 성직자가 한 사람도 없는 채로 시작된 교회였다.
충돌은 제사에서 터졌다. 1790년 북경 주교가 제사를 금하자, 1791년 전라도 진산의 윤지충이 어머니 상에 신주를 불살랐다. 조정은 이를 강상(綱常)을 무너뜨린 죄로 다스렸다 — 조선에서 신앙 때문에 처형된 첫 사례다.
1795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몰래 들어와 처음으로 성직자가 생겼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로 주문모와 정약종, 여성 지도자 강완숙이 처형되고 정약용은 유배됐다. 이 박해 중 황사영이 외국 군대의 개입까지 요청하는 백서를 쓰다 발각되면서, 천주교는 «나라를 팔 수 있는 무리»라는 낙인을 얻었다.
1831년 조선대목구가 설정되고 프랑스 선교사들이 들어왔지만, 1839년 기해박해로 앵베르 주교와 모방·샤스탕 신부가 처형됐다. 1846년에는 조선인 첫 사제 김대건이 순교했다. 그리고 1866년 병인박해 — 프랑스 선교사 아홉 명과 수천 명의 신자가 죽었다. 그해 가을, 대동강에는 개신교 선교사 토마스를 태운 배가 들어오고 있었다.
개념
먼저 정의하고 갑니다
- 자생 교회
- 선교사의 파송 없이 현지인이 스스로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주며 시작된 공동체. 조선 천주교는 세계 교회사에서 드문 사례로 꼽히지만, «자생»의 범위(북경 교회의 승인과 지도를 어디까지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 강상죄綱常罪
- 삼강오상, 곧 사회의 기본 질서를 무너뜨린 죄. 조선 정부가 천주교를 다룬 법적 근거가 «종교 금지»가 아니라 이 죄목이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제사 거부가 곧 부모와 임금을 부정하는 행위로 읽혔다.
- 박해와 정쟁
- 신유박해(1801)는 노론 벽파가 남인 시파를 치는 정치적 국면과 겹쳐 있었다. 박해의 시기·강도를 신앙 탄압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정치사 연구의 지적이다.
사건
그때 일어난 일
- 1784전해짐
이승훈의 세례와 명례방 모임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이 동료들에게 세례를 주며 신앙 공동체가 시작됐다. 성직자 없이 평신도가 세운 교회였다.
- 1791수난
진산 사건
전라도 진산의 윤지충과 권상연이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사른 일로 처형됐다. 신앙을 이유로 사람이 죽은 첫 사건이다.
- 1795전해짐
주문모 신부 입국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변복하고 국경을 넘어 들어와 조선 교회에 처음으로 성직자가 생겼다.
- 1801수난
신유박해와 황사영 백서
주문모·정약종·강완숙 등이 처형되고 정약용 형제가 유배됐다. 황사영이 북경 주교에게 외국 함대의 개입을 요청하는 편지를 쓰다 발각되면서 천주교에 대한 적대가 더 굳어졌다.
- 1839수난
기해박해
앵베르 주교와 모방·샤스탕 신부를 비롯해 많은 신자가 처형됐다.
- 1846수난
김대건 순교
조선인 첫 사제 김대건이 새 선교사의 입국로를 찾다 체포되어 새남터에서 처형됐다. 스물다섯이었다.
- 1866수난
병인박해
프랑스 선교사 아홉 명과 수천 명의 신자가 처형됐다. 절두산은 이 시기 처형지 가운데 하나다.
사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이승훈
1756–1801조선인 첫 영세자
북경에서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조선 신앙 공동체의 출발점이 됐다.
한계와 다른 평가
박해 앞에서 여러 차례 배교를 표명했다가 돌아서기를 되풀이했고, 그 흔들림 때문에 오늘까지 평가가 엇갈린다.
정약종
1760–1801『주교요지』 저자
한글로 교리서를 써서 글 모르는 사람도 신앙을 배우게 했고, 신유박해 때 순교했다.
한계와 다른 평가
동생 정약용은 배교하고 유배되어 살아남았다. 한 집안에서 갈린 이 선택을 두고 어느 쪽이 옳았는지는 지금도 논쟁거리다.
강완숙
1761–1801여회장
양반가 여성으로서 주문모 신부를 숨기고 여성 신자 공동체를 이끌었다. 조선 사회에서 여성이 조직을 이끈 드문 자리였다.
한계와 다른 평가
그의 활동은 남성 기록자의 심문 조서와 교회 기록을 통해서만 남아 있어, 본인의 말은 거의 남지 않았다.
김대건
1821–1846조선인 첫 사제
마카오에서 공부하고 사제가 되어 돌아와 선교사 입국로를 찾다 체포·처형됐다.
한계와 다른 평가
그의 활동 기간은 1년 남짓이었다. 상징의 무게에 비해 실제 사목의 시간은 짧았다.
정하상
1795–1839평신도 지도자·『상재상서』 저자
신유박해로 아버지 정약종을 잃고 살아남아, 성직자를 들여오기 위해 여러 차례 국경을 넘었다. 재상에게 올리는 글의 형식으로 신앙을 변론한 『상재상서』를 써서 «천주교는 반역이 아니다»라고 조목조목 밝혔다.
한계와 다른 평가
그의 변론은 조정을 설득하지 못했고 그 자신도 기해박해로 처형됐다. 논리로 설득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이 글을 아프게 만든다.
그때의 기록
남아 있는 자료
『기해일기』와 『치명일기』는 박해 때 죽은 사람들의 이름·나이·직업·죽은 자리를 적어 남긴 기록이다. 순교자를 «수»가 아니라 «이름»으로 남기려 한 초기 교회의 노력이 여기서 확인된다.
확인
잘못 알려진 이야기
이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의 박해는 순전히 종교 탄압이었다.”
확인해 보면
신앙 자체와 함께, 제사 거부가 «부모와 임금을 부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 사회 질서의 충돌이 컸다. 정치 세력 다툼(노론과 남인)도 박해의 시기와 강도를 좌우했다.
갈리는 것
견해가 나뉩니다
황사영 백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신앙의 절박함으로 보는 쪽
몰살 위기에 놓인 신자들이 살길을 찾아 외부에 호소한 것으로, 그 시대 상황을 떼고 판단할 수 없다고 본다.
국가에 대한 배신으로 보는 쪽
외국 군대의 무력 개입을 요청한 것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으며, 이후 박해가 거세진 빌미가 됐다고 본다.
연구사
학계는 이렇게 읽어 왔습니다
쟁점
황사영 백서를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가
신앙사적 맥락에서 읽는 쪽
몰살 위기에 놓인 소수 종교 공동체의 절박한 구원 요청으로 보고, 근대 이전 «국가»와 «신앙 공동체»의 관계를 오늘의 국민국가 기준으로 재단할 수 없다고 본다.
정치사적 결과를 무겁게 보는 쪽
외세의 무력 개입 요청은 그 자체로 중대한 선택이며, 이후 천주교가 «외세와 결탁한 집단»으로 규정되는 결정적 빌미가 됐다고 본다.
현장
이 시대를 볼 수 있는 곳
오늘
나에게 묻는 질문
이 땅에서 신앙을 지키다 죽은 첫 사람들은 개신교인이 아니었다. 나는 나와 다른 전통의 신앙 선조를 어떻게 대하고 있나?
더 읽을 것
이 시대를 더 파려면
- 조광『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
- 달레(Ch. Dallet)『한국천주교회사』19세기 선교사 기록. 사료 가치가 크지만 전문(傳聞)이 많아 비판적 독해가 필요하다.
- 한국교회사연구소『한국천주교회사』현대 학술 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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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문제
1조선 천주교회가 시작된 방식은?
21791년 진산 사건의 직접적인 발단은?
3조선인 첫 사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