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이 온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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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 161832–1866

문을 두드리다

수난

닫힌 나라의 해안에 내린 사람들은 무엇을 남기고 갔나?

  • 개신교 선교사들이 조선의 해안에 처음 닿았지만, 아무도 오래 머물지 못했다.
  • 1832년 귀츨라프는 서해의 섬에서 한 달을 보내며 성경을 나누고 감자 심는 법을 가르쳤다.
  • 1866년 토마스는 대동강에서 성경을 건네려다 죽었고, 그해 조선은 병인박해와 병인양요를 함께 겪었다.

흐름

무슨 일이 있었나

1832년 7월, 영국 동인도회사 상선 로드 애머스트호가 서해에 나타났다. 배에 탄 독일인 선교사 카를 귀츨라프는 충청도 고대도 앞바다에 한 달 가까이 머물며 한문 성경과 전도문서를 나누고, 주민에게 감자 심는 법과 포도주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 통상 요청은 거절당했고 배는 떠났다.

그로부터 삼십여 년 뒤, 웨일스 출신 선교사 로버트 토마스가 조선에 관심을 두었다. 1865년 서해안에 두 달 남짓 머물며 조선말을 익혔고, 이듬해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에 통역으로 올라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으로 향했다.

셔먼호는 통상을 요구하며 강을 거슬렀고, 물이 빠지자 모래톱에 얹혔다. 조선군과 평양 백성의 공격으로 배는 불탔고 승선자 전원이 죽었다. 토마스도 그중 하나였다. 1866년 9월이었다.

같은 해 봄에는 병인박해로 프랑스 선교사들이 처형됐고, 가을에는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공했다(병인양요). 조선에게 서양과 그리스도교는 하나의 위협으로 묶였다. 문은 더 굳게 닫혔다.

개념

먼저 정의하고 갑니다

문서 선교
입국이 막힌 지역에 한문 성경과 전도문서를 먼저 들여보내는 방식. 귀츨라프와 토마스가 조선 해안에서 한 일이 이것이며, 중국에서 이미 쓰이던 방법이 조선에 적용된 것이다.
포함외교砲艦外交
군함의 무력을 배경으로 통상을 요구하던 19세기 서구의 방식.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이 맥락 안에 있으며, 선교사가 그 배에 타고 있었다는 사실이 «선교와 제국주의»라는 물음을 이 시대에 처음 던진다.

사건

그때 일어난 일

  1. 1832.7전해짐

    귀츨라프, 고대도에 머물다

    로드 애머스트호를 타고 온 카를 귀츨라프가 충청도 고대도 앞바다에 약 한 달간 머물며 한문 성경과 전도문서를 나누고 감자 재배법을 가르쳤다. 개신교 선교사가 조선 땅에 머문 이른 기록이다.

    출처 · 귀츨라프의 항해기(1834)
  2. 1865전해짐

    토마스의 첫 조선 방문

    로버트 토마스가 서해안에 두 달 남짓 머물며 조선말을 익히고 한문 성경을 나눴다.

  3. 1866.9수난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토마스의 죽음

    통상을 요구하며 대동강을 거슬러 오른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에서 불탔고, 통역으로 탔던 선교사 토마스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

  4. 1866.9~11사회

    병인양요

    병인박해로 선교사가 처형된 데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공했다. 서양과 그리스도교가 하나의 위협으로 인식되는 계기가 됐다.

  5. 1880전해짐

    『한불자전』 간행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조선어–프랑스어 사전을 펴냈다. 밖에서 조선어를 붙들고 있던 사람들의 오랜 준비가 남긴 결과다.

사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카를 귀츨라프

1803–1851Karl Gützlaff

독일 출신 선교사

동아시아를 다니며 전도 문서를 뿌렸고, 조선 서해의 섬에서 한 달을 보냈다.

한계와 다른 평가

그의 항해는 영국 상선의 통상 시도에 얹힌 것이었고, 조선에 남긴 열매를 확인할 기록은 없다. 선교와 상업·외교가 뒤섞인 초기 서양 진출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준다.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1839–1866Robert Jermain Thomas, 최난헌

웨일스 출신 선교사

조선에 들어가려는 뜻을 품고 두 차례 서해에 왔으며, 두 번째 걸음에서 대동강에서 죽었다.

한계와 다른 평가

그가 탄 배는 무장한 상선이었고 통상을 강요하며 조선 관리를 억류하기도 했다. 그의 죽음을 «순교»로만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신중한 평가가 필요하다는 시각이 있다.

펠릭스 클레르 리델

1830–1884Félix-Clair Ridel, 이복명

파리외방전교회 신부·주교

병인박해 때 살아남아 중국으로 피신했고, 밖에서 조선어를 정리해 『한불자전』과 조선어 문법서를 펴냈다. 뒤에 몰래 들어왔다가 붙잡혀 추방됐다.

한계와 다른 평가

그가 박해 소식을 프랑스 함대에 알린 일이 병인양요로 이어졌다. 신자를 살리려는 행동이 결과적으로 더 큰 박해를 불렀다는 평가가 함께 따라붙는다.

그때의 기록

남아 있는 자료

귀츨라프는 자신의 항해기에 조선 해안에서 보낸 날들과 주민들과의 접촉, 통상 요청이 거절된 경위를 적었다. 조선 사람들의 태도와 관리들의 대응을 서양인의 눈으로 기록한 이른 자료다.

K. Gützlaff, 『중국 연안 세 차례 항해기』(1834) · 1834

확인

잘못 알려진 이야기

이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토마스는 죽는 순간 성경을 건넸고, 그를 죽인 병사 박춘권이 그 성경을 읽고 회심했다.”

확인해 보면

이 이야기는 사건이 있고 수십 년 뒤의 증언에 근거한 것으로, 당대의 1차 기록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널리 사랑받는 이야기지만 «확인된 사실»과 «전해지는 이야기»는 구분해 두어야 한다. 다만 셔먼호 사건 뒤 평양에 한문 성경이 남아 돌아다녔다는 기록은 여러 갈래로 전한다.

연구사

학계는 이렇게 읽어 왔습니다

쟁점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로 부를 수 있는가

순교로 보는 쪽

그의 동기가 선교였고 성경을 전하려다 죽었다는 점을 중시한다. 한국 개신교사 서술의 오랜 전통이며, 평양 대부흥의 «씨앗»으로 연결하는 서사가 여기서 나온다.

신중해야 한다는 쪽

그가 탄 배가 무장 상선이었고 조선 관리를 억류하는 등 무력 충돌의 당사자였음을 지적한다. 죽음의 상황과 신앙적 동기를 구분해 서술해야 한다고 본다.

지금 대체로 합의된 것 — «박춘권 회심»을 비롯한 후일담이 1차 사료로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은 대체로 인정된다.

신학

무엇을 믿었기에 그렇게 했나

복음 전파에 국가의 힘을 빌려도 되는가

고후 10:3–4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문을 여는 수단으로 본 쪽

조약과 함포로 열린 길이라도 복음이 들어가면 하나님이 쓰신 것이라 보았다. 19세기 서구 선교의 주류 정서였다.

복음을 훼손한다고 본 쪽

무력에 업힌 선교는 받는 쪽에서 «침략의 한 갈래»로 읽히며, 실제로 조선은 그렇게 읽었다. 병인양요 이후 박해가 거세진 것이 그 증거다.

오늘로 이어지는 것 — 이 물음은 오늘 «창의적 접근 지역» 선교의 방법 논쟁으로 이어진다. 들어가는 방식이 메시지의 일부가 된다는 문제다.

현장

이 시대를 볼 수 있는 곳

오늘

나에게 묻는 질문

열매를 보지 못하고 떠난 사람들이 있다. 결과가 보이지 않는 수고를 나는 어떻게 견디고 있나?

1차 사료

무엇을 보아야 하나

사료는 «무엇을 말하는가»만큼 «무엇을 말하지 못하는가»가 중요합니다. 각 자료마다 그 한계를 함께 적었습니다.

회고록1834 런던 간행

중국 연안 세 차례 항해기

카를 귀츨라프 · Journal of Three Voyages along the Coast of China

후원 모금을 염두에 둔 출판물이다. 접촉의 성과가 긍정적으로 서술되는 경향을 감안해야 한다.

관찬사료1866

제너럴 셔먼호 사건 관련 장계·자문

조선 관측의 보고라 선박의 도발 행위가 강조된다. 반대로 서양 측 기록은 조선의 공격성을 부각한다. 두 계열을 맞대어 읽어야 한다.

볼 수 있는 곳 · 『고종실록』·『일성록』,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더 읽을 것

이 시대를 더 파려면

  • 옥성득『첫 사건으로 본 초대 한국교회사』토마스 서사의 형성과 검증
  • 이덕주『초기 한국기독교사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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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문제

  1. 11832년 고대도에 머물며 감자 심는 법을 가르친 선교사는?

  2. 2토마스가 죽은 곳은?

  3. 31866년 조선에서 함께 일어난 일이 아닌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