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이 온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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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 161873–1884

국경 밖에서 번역된 성경

부흥

선교사가 들어오기도 전에, 한글 성경은 어떻게 먼저 들어왔나?

  • 만주와 일본에서 조선 사람들의 손으로 성경이 한글로 옮겨졌다.
  • 번역을 도운 조선 청년들이 먼저 세례를 받았고, 그들이 책을 지고 국경을 넘었다.
  • 선교사가 서울에 도착하기 전인 1884년, 황해도 소래에는 이미 예배 처소가 있었다.

흐름

무슨 일이 있었나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선교사 존 로스는 만주에서 활동하며 조선에 관심을 두었다. 1874년과 이듬해 고려문에서 조선 상인들을 만났고, 그중 이응찬을 어학 선생으로 삼았다. 조선말을 배우기 위해 시작된 관계가 번역으로, 번역이 신앙으로 이어졌다.

이응찬·백홍준·서상륜·이성하 같은 청년들이 로스와 매킨타이어를 도와 번역에 참여했고, 그 과정에서 세례를 받았다. 1882년 심양에서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와 요한복음이 낱권으로 나왔다. 조선말로 인쇄된 첫 성경이었고, 1887년에는 신약 전체가 『예수셩교젼셔』로 묶였다.

같은 시기 일본에서는 이수정이 성경을 옮기고 있었다. 1885년 요코하마에서 나온 그의 마가복음은, 그해 조선으로 오는 선교사들의 손에 들려 제물포에 닿았다. 선교사가 «가지고 들어간» 것이 아니라 «먼저 번역된 것을 받아» 들어간 셈이다.

책은 사람이 옮겼다. 서상륜은 권서(勸書)가 되어 성경을 지고 국경을 넘었고, 붙잡힐 위기를 여러 번 넘겼다. 1884년, 그와 동생 서경조가 고향인 황해도 장연 소래에 신앙 공동체를 세웠다. 서울에 선교사가 자리 잡기 전이었다.

개념

먼저 정의하고 갑니다

권서勸書, colporteur
성경과 전도문서를 지고 다니며 팔거나 나눠 주던 사람. 성서공회 체계에서 정식 직책이었고, 조선에서는 선교사보다 먼저 국내에 들어간 이들이 바로 이 권서였다.
로스역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 그리고 이응찬·서상륜·백홍준 등 조선인 조력자들이 만주에서 옮긴 한글 성경(1882년 낱권, 1887년 『예수셩교젼셔』). «로스역»이라는 이름이 조선인들의 몫을 가린다는 지적이 오래전부터 있었다.
하나님 · 하느님 논쟁
신명(神名)을 무엇으로 옮길 것인가의 문제. 로스역은 «하느님»에 가까운 표기를, 뒤의 공인역은 «하나님»을 택했다. 번역어 선택이 곧 토착화의 방식이었음을 보여 주는 사례다.

사건

그때 일어난 일

  1. 1874~전해짐

    로스, 고려문에서 조선 상인을 만나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존 로스가 국경 시장 고려문에서 조선 상인들과 접촉하고 이응찬을 어학 선생으로 맞았다.

  2. 1879전해짐

    번역을 돕던 청년들의 세례

    백홍준·이응찬 등 번역을 돕던 조선 청년들이 만주에서 세례를 받았다. 조선 개신교 신자의 이른 사례다.

  3. 1882전해짐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 간행

    심양에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한글 낱권으로 인쇄됐다. 조선말로 찍힌 첫 성경이다.

  4. 1883~전해짐

    서상륜, 권서가 되어 국경을 넘다

    번역에 참여한 서상륜이 성경을 지고 국내로 들어가 배포했다. 책을 나르는 일 자체가 목숨을 건 일이었다.

  5. 1884전해짐

    소래(송천) 신앙 공동체

    서상륜·서경조 형제가 고향 황해도 장연 소래에 예배 처소를 세웠다. 선교사가 세운 것이 아니라 조선 사람이 세운 공동체다.

  6. 1885전해짐

    이수정의 마가복음

    일본에서 신앙을 갖게 된 이수정이 옮긴 마가복음이 요코하마에서 나왔고, 조선으로 오던 선교사들이 이 책을 들고 들어왔다.

  7. 1887전해짐

    『예수셩교젼셔』 — 한글 신약전서

    로스 일행의 번역이 신약 전체로 묶여 간행됐다.

사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존 로스

1842–1915John Ross

스코틀랜드 선교사·번역 주관

만주에서 조선 청년들과 함께 한글 성경을 번역하고 출판했다. 조선에 들어와 살지는 못했지만 조선어 성경의 기틀을 놓았다.

한계와 다른 평가

번역의 실제 작업은 조선 청년들의 손에 크게 기대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로스역»이라는 이름 아래 그들의 몫은 흐려져 있었다.

서상륜

1848–1926

권서·소래교회 설립자

만주에서 세례를 받고 성경을 지고 들어와 배포했으며, 고향 소래에 신앙 공동체를 세웠다.

한계와 다른 평가

그가 뿌린 씨는 컸지만 정식 교육을 받은 목회자는 아니었고, 뒤에 들어온 선교사 중심 체제 안에서 초기 한국인 전도자들의 역할은 축소되어 기록됐다.

이수정

1842?–1886

일본에서의 번역자

수신사 일행으로 일본에 갔다가 신앙을 갖고, 한문 성경에 토를 달고 마가복음을 우리말로 옮겼다.

한계와 다른 평가

귀국 뒤의 행적과 죽음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이 적다. 신앙을 지켰는지를 두고도 자료가 엇갈린다.

서경조

1852–1938

소래교회·한국인 첫 목사 일곱 중 하나

형 서상륜과 함께 고향 소래에 신앙 공동체를 세웠고, 1907년 첫 목사 일곱 사람 가운데 하나가 됐다. 밖에서 자란 신앙이 제도 교회로 이어지는 다리 같은 사람이다.

한계와 다른 평가

형의 이름에 가려 그의 몫은 오래 작게 다뤄졌다. 소래교회의 초기 사정도 후대의 기록에 크게 기대고 있다.

백홍준

1848–1893

권서·초기 신자

번역을 돕고 세례를 받은 뒤 국내에서 전도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계와 다른 평가

그의 생애는 짧은 기록으로만 남아 있어, 초기 한국인 전도자들이 겪은 일이 얼마나 적게 기록되었는지를 보여 준다.

그때의 기록

남아 있는 자료

로스는 본국 선교부에 보낸 보고에서 조선어 번역의 진행 상황과 조선인 조력자들의 역할, 국경을 넘어 책이 들어가는 경로를 적었다. 번역이 «누구의 일»이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자료다.

존 로스의 선교 보고와 서한 · 1877–1887

『예수셩교젼셔』(1887)는 오늘날 우리가 쓰는 한글 성경 용어의 초기 모습을 보여 준다. 표기와 어휘 선택에서 조선 사람의 손이 닿은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예수셩교젼셔』 · 1887

확인

잘못 알려진 이야기

이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 개신교는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도착하면서 시작됐다.

확인해 보면

그 전에 이미 한글 성경이 번역·인쇄됐고, 세례받은 조선인 신자와 예배 공동체가 있었다. 1885년은 «시작»이 아니라 «선교부가 자리 잡은 해»로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

연구사

학계는 이렇게 읽어 왔습니다

쟁점

한국 개신교의 «시작»을 언제로 잡을 것인가

1884~85년 선교사 입국

제도적 선교의 시작을 기준으로 삼는 오래된 서술. 선교부 중심 사료가 풍부해 서술이 쉽다는 이점이 있다.

1870~80년대 만주·일본의 번역과 소래교회

한글 성경과 세례받은 신자, 예배 공동체가 그전에 있었다는 사실을 중시한다. 한국 교회의 «자생성»을 강조하는 서술이 여기서 나온다.

지금 대체로 합의된 것오늘의 통사는 대개 두 흐름을 함께 서술한다. 다만 «자생성»을 얼마나 강조할지는 연구자마다 다르다.

현장

이 시대를 볼 수 있는 곳

오늘

나에게 묻는 질문

이름이 남지 않은 번역자와 권서들이 길을 냈다. 나는 누구의 수고 위에 서 있나?

더 읽을 것

이 시대를 더 파려면

  • 옥성득『대한성서공회사』 관련 연구번역과 반포의 실제 과정
  • 류대영『초기 미국 선교사 연구』선교사 중심 서술을 상대화한다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한국 기독교의 역사』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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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문제

  1. 1한글로 인쇄된 첫 성경(1882)이 나온 곳은?

  2. 21884년 황해도 소래에 신앙 공동체를 세운 사람은?

  3. 31885년 조선에 들어오는 선교사들이 손에 들고 온 성경을 번역한 사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