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문
복음은 어떻게 «금지된 것»에서 «환영받는 것»이 되었나?
- 의사로 들어온 알렌이 갑신정변에서 민영익을 살리면서, 왕실이 서양 의술과 그 뒤의 사람들에게 문을 열었다.
- 1885년 부활절 아침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제물포에 내렸고, 학교와 병원이 먼저 세워졌다.
- 직접 전도가 금지된 십 년 동안, 교회는 «가르치고 고치는 일»로 신뢰를 얻었다.
흐름
무슨 일이 있었나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맺어지며 미국 선교부가 조선을 주목했다. 그러나 조선은 여전히 전도를 법으로 금하고 있었다. 문을 연 것은 설교가 아니라 수술이었다.
1884년 9월 의사 호러스 알렌이 미국 공사관 의사로 들어왔다. 그해 12월 갑신정변에서 칼에 찔린 민영익을 그가 치료해 살렸다. 왕실의 신뢰를 얻은 알렌의 건의로 1885년 4월 왕립 병원 광혜원이 문을 열었고, 곧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장로교의 언더우드와 감리교의 아펜젤러 부부가 제물포에 닿았다. 아펜젤러 부부는 정세가 불안하다는 권고로 일본에 돌아갔다가 그해 여름 다시 들어왔다. 그들의 손에는 이수정이 일본에서 옮긴 마가복음이 들려 있었다.
전도가 막혀 있었으므로 그들은 학교와 병원을 세웠다. 1885년 배재학당, 1886년 이화학당과 여성 전용 병원 보구여관이 시작됐다. 1886년 노춘경이 세례를 받았고, 1887년에는 새문안교회와 정동제일교회가 조직됐다. 새문안교회 창립 예배 자리에는 소래에서 올라온 신자들이 있었다 — 서상륜이 뿌린 씨가 서울에서 만난 것이다.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888년에는 «서양 사람이 아이를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돌아 선교사들이 몸을 사려야 했다(영아 소동). 조선 사람들에게 그들은 여전히 낯설고 두려운 존재였다.
개념
먼저 정의하고 갑니다
- 치외법권과 선교
- 조약으로 얻은 외국인의 법적 지위가 선교 활동의 실질적 우산이 됐다. 전도가 금지된 상태에서도 선교사가 학교와 병원을 운영할 수 있었던 배경이며, 동시에 «선교와 불평등조약»이라는 비판의 근거이기도 하다.
- 의료 선교
- 진료를 통해 신뢰를 얻고 접촉면을 넓히는 방식. 제중원은 왕립 병원이면서 선교사가 운영을 맡은 이중적 기관이었고, 이 «관·교 협력»이 초기 선교의 특징이다.
- 선교지 분할협정comity
- 교파들이 지역을 나눠 맡기로 한 합의(1890년대 후반 이후 본격화). 한 마을에 여러 교파가 겹치지 않게 해 효율을 높였지만, 오늘까지 남은 «지역별 교파색»(호남 남장로교, 영남 북장로교·호주장로교, 관서 북장로교 등)의 기원이 됐다.
사건
그때 일어난 일
- 1884.9전해짐
알렌 입국
의사 호러스 알렌이 미국 공사관 소속 의사로 조선에 들어왔다. 신분은 외교관 부속 의사였고, 이것이 전도 금지 아래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이었다.
- 1884.12사회
갑신정변과 민영익 치료
정변의 칼에 중상을 입은 민영익을 알렌이 치료해 살렸다. 서양 의술에 대한 왕실의 신뢰가 여기서 시작됐다.
- 1885.4사회
광혜원(제중원) 개원
조선 최초의 서양식 국립 병원이 문을 열었다. 곧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꿨고, 뒤에 세브란스로 이어진다.
- 1885.4.5전해짐
언더우드·아펜젤러 제물포 도착
부활절 아침 두 선교사가 제물포에 내렸다. 아펜젤러 부부는 정세 때문에 일단 돌아갔다가 여름에 재입국했다.
- 1885사회
배재학당
아펜젤러가 학교를 시작했다. 전도가 막힌 자리에서 교육이 통로가 됐다.
- 1886사회
이화학당과 보구여관
메리 스크랜턴이 여학생 한 명으로 이화학당을 시작했고, 여성만을 위한 병원 보구여관이 문을 열었다. 여성이 배우고 치료받을 자리가 처음 생겼다.
- 1886.7전해짐
노춘경의 세례
국내에서 개신교 세례를 받은 이른 사례로 기록된다. 금지된 일이었으므로 몰래 이루어졌다.
- 1887.9제도
새문안교회 조직
언더우드를 중심으로 조직됐고, 소래에서 올라온 신자들이 함께했다. 밖에서 자란 씨와 안에서 세운 선교부가 만난 자리다.
- 1887.10제도
정동제일교회 조직
아펜젤러를 중심으로 감리교 교회가 조직됐다. 지금의 벧엘예배당은 1897년에 봉헌됐다.
- 1888수난
영아 소동
서양인이 아이를 해친다는 소문이 퍼져 선교 활동이 크게 위축됐다. 신뢰는 아직 쌓이기 전이었다.
- 1890전해짐
성서 반포와 문서 사업
성서공회 조직과 함께 번역·반포가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사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호러스 알렌
1858–1932Horace N. Allen, 안련의료 선교사·뒷날 미국 공사
의사로 들어와 왕실의 신뢰를 얻고 제중원을 세워, 닫힌 문을 여는 첫 손잡이가 됐다.
한계와 다른 평가
그는 뒤에 선교사를 그만두고 외교관이 되어 미국의 이권 확보에 깊이 관여했다. 선교와 국가 이익이 뒤엉킨 초기 서양 진출의 그늘을 그의 이력이 그대로 보여 준다.
호러스 언더우드
1859–1916Horace G. Underwood, 원두우장로교 선교사
새문안교회를 조직하고 사전·문법서를 펴냈으며, 뒤에 연희전문학교로 이어지는 교육 사업을 폈다.
한계와 다른 평가
선교 정책과 교육 방향을 두고 동료 선교사들과 자주 부딪혔고, 한국인 지도자를 세우는 속도에 대해서도 견해가 갈렸다.
헨리 아펜젤러
1858–1902Henry G. Appenzeller, 아편설라감리교 선교사
배재학당을 세우고 정동제일교회를 조직했으며 성경 번역에 참여했다. 1902년 목포로 가던 배가 부딪혀 침몰할 때 세상을 떠났다.
한계와 다른 평가
그가 세운 학교는 근대 교육의 문을 열었지만, 동시에 서구식 교육이 «문명»이고 조선의 것은 «미개»라는 시선을 함께 실어 왔다는 비판도 받는다.
메리 스크랜턴
1832–1909Mary F. Scranton감리교 여성 선교사
쉰이 넘은 나이에 조선에 와 이화학당을 시작했다. 학생이 한 명뿐인 채로 시작된 학교였다.
한계와 다른 평가
초기 여학생 대부분은 가난하거나 기댈 곳이 없는 아이들이었다. 교육의 문이 열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곧 사회적 인정으로 이어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존 헤론
1856–1890John W. Heron, 혜론제중원 의사
알렌의 뒤를 이어 제중원을 맡아 하루에도 수십 명을 진료했고, 무리한 왕진 끝에 이질에 걸려 서른넷에 세상을 떠났다. 양화진에 처음으로 묻힌 사람이다.
한계와 다른 평가
그의 이른 죽음은 초기 선교사들이 얼마나 준비 없이 병과 마주했는지 보여 준다. 동료들과의 갈등도 기록에 남아 있어, 초기 선교부가 늘 화목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윌리엄 스크랜턴
1856–1922William B. Scranton의사·시병원 설립
어머니 메리와 함께 들어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병원을 열었다. 성 밖의 버려진 환자들을 찾아다니며 진료한 일로 알려졌다.
한계와 다른 평가
1907년 선교부와 갈등을 빚고 선교사직을 그만두었다. 그 이유를 두고 기록이 엇갈려, 초기 선교부 안의 긴장을 보여 주는 사례로 남았다.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
1851–1921Lillias H. Underwood의사·언더우드의 아내
여성 의사로 들어와 명성황후를 진료했고, 조선에서 보고 들은 것을 여러 권의 책으로 남겼다.
한계와 다른 평가
그의 글에는 조선의 삶을 낯설고 미개한 것으로 그린 대목이 적지 않다. 귀한 기록이면서 동시에 그 시대 서양인의 시선을 그대로 보여 주는 자료다.
그때의 기록
남아 있는 자료
“우리는 부활주일에 이곳에 왔습니다. 이 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주옵소서.”
아펜젤러가 제물포 도착일에 남긴 것으로 널리 전해지는 기도문. 감리교 선교 보고를 통해 알려졌다.
알렌의 일기와 제중원 보고서는 개원 첫해의 진료 인원과 질병 종류를 숫자로 남겼다. 선교가 «말»보다 «손»으로 시작됐음을 보여 주는 자료다.
확인
잘못 알려진 이야기
이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언더우드는 배 위에서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로 시작하는 기도를 드렸다.”
확인해 보면
널리 인용되지만 언더우드가 남긴 기록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후대에 지어져 퍼진 글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감동적인 글이라도 «누구의 말인지»는 정확히 해야 한다.
이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1885년 4월 5일이 한국 개신교의 시작이다.”
확인해 보면
그 전에 한글 성경과 세례받은 신자, 소래의 예배 공동체가 이미 있었다. 그날은 «선교부가 시작된 날»이다.
연구사
학계는 이렇게 읽어 왔습니다
쟁점
초기 개종의 동기를 무엇으로 볼 것인가
종교적 회심을 중시하는 쪽
사경회와 개인의 회심 체험 기록을 근거로, 신앙적 동기가 일차적이었다고 본다.
사회적 조건을 중시하는 쪽
신분 상승, 근대 교육과 의료에 대한 접근, 외국인의 보호 같은 현실적 유인을 지적한다. 초기 신자에 중인·상인·여성·천민이 많았다는 구성 자료가 근거다.
지금 대체로 합의된 것 — 두 동기를 대립시키기보다 «무엇이 사람들을 교회로 오게 했고, 무엇이 남게 했는가»를 나눠 묻는 것이 최근의 접근이다.
현장
이 시대를 볼 수 있는 곳
- 제중원 터(재동)서울 · 학교·병원의 시작1885년 알렌의 건의로 문을 연 조선 첫 서양식 병원 광혜원·제중원의 자리. 지금은 헌법재판소가 있다.
- 새문안교회서울 · 초기 교회 건물1887년 언더우드를 중심으로 조직됐다. 창립에 소래에서 올라온 신자들이 함께했다.
- 정동제일교회 벧엘예배당서울 · 초기 교회 건물1887년 아펜젤러가 조직한 감리교회. 지금의 벧엘예배당은 1897년에 봉헌된 국가 사적이다.
- 배재학당역사박물관서울 · 학교·병원의 시작1885년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의 동관을 박물관으로 쓴다. 근대 교육이 시작된 자리다.
- 이화박물관(심슨기념관)서울 · 학교·병원의 시작메리 스크랜턴이 학생 한 명으로 시작한 이화학당의 자리. 여성이 배우기 시작한 곳이다.
- 인천 내리교회경기·인천 · 초기 교회 건물아펜젤러가 제물포에 내린 뒤 시작된 감리교회. 한국 감리교의 출발점으로 꼽힌다.
-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서울 · 초기 교회 건물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으로, 성공회가 조선에 들어온 초기의 흔적을 보여 준다.
-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서울 · 순교지·묘원언더우드·헤론·아펜젤러 가족을 비롯해 이 땅에서 일하다 묻힌 외국인 500여 기가 있다. 100주년기념교회가 해설을 맡는다.
오늘
나에게 묻는 질문
그들은 말이 막혔을 때 학교와 병원을 세웠다. 내가 말로 전할 수 없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더 읽을 것
이 시대를 더 파려면
- 류대영『초기 미국 선교사 연구』선교사들의 사회·신학적 배경
- 이만열『한국기독교의료사』 관련 연구제중원과 의료 선교
- 안종철『미국 선교사와 한미관계』선교와 외교의 얽힘
판본과 출판연도는 도서관 목록에서 확인하세요. 이 앱은 확실하지 않은 서지 정보를 적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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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문제
1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21885년 부활절에 제물포에 도착한 두 선교사는?
3전도가 금지된 시기에 선교사들이 택한 통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