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이 온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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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 161890–1902

뿌리내리는 방식

부흥

왜 한국 교회는 처음부터 «스스로 부담하는 교회»가 되었나?

  • 선교사들은 네비우스 방법을 받아들여, 교회가 스스로 전하고·다스리고·부담하도록 정했다.
  • 성경을 함께 공부하는 «사경회»가 신앙의 뼈대가 됐고, 한글 성경이 그 도구였다.
  • 선교부는 부산·대구·전주·군산·목포·광주·평양·선천으로 퍼졌고, 신분의 벽이 교회 안에서 먼저 흔들렸다.

흐름

무슨 일이 있었나

1890년 중국에서 일하던 선교사 존 네비우스가 서울을 방문해 젊은 선교사들에게 자신의 방법을 설명했다. 요지는 이것이었다 — 돈으로 사람을 고용해 교회를 세우지 말고, 각 신자가 자기 자리에서 일하며 스스로 전하게 하라. 교회는 스스로 다스리고, 예배당은 스스로 지어라.

1893년 장로회 선교사공의회는 이 원칙을 정책으로 못 박았다. 상류층보다 일하는 사람과 부녀자를 먼저 찾을 것, 한글 성경을 쓸 것, 학교는 반드시 성경을 가르칠 것, 자립을 목표로 할 것. 이 결정이 이후 한국 교회의 성격을 크게 좌우했다.

«사경회»가 그 중심이었다. 농한기에 며칠씩 모여 성경을 통독하고 배우는 모임이었다. 여기서 한글을 처음 배운 사람이 많았다. 성경을 읽기 위해 글자를 배웠고, 글자를 배우자 세상이 달라졌다.

선교부는 사방으로 퍼졌다. 1891년 부산, 1893년 평양과 전주, 1896년 대구와 군산, 1898년 목포, 1901년 선천. 1892년 미국 남장로교의 일곱 젊은이가 들어와 호남을 맡았다.

교회 안에서 신분이 흔들렸다. 1895년 무렵 백정 박성춘이 곤당골교회에서 양반들과 한자리에 앉아 예배한 일은 조선 사회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그의 아들 박서양은 뒷날 세브란스에서 의학을 배워 의사가 됐다.

사건

그때 일어난 일

  1. 1890제도

    네비우스 방한

    중국에서 일하던 존 네비우스가 서울에 와 자립·자전·자치의 방법을 설명했고, 젊은 선교사들이 이를 받아들였다.

  2. 1891전해짐

    부산 선교부

    부산에 선교 거점이 마련되면서 남쪽 항구가 통로가 됐다.

  3. 1892전해짐

    남장로교 일곱 사람

    레이놀즈 부부, 전킨 부부, 테이트 남매, 리니 데이비스가 들어와 호남 선교를 맡았다. 전주·군산·목포·광주·순천의 선교부가 여기서 나온다.

  4. 1893제도

    선교사공의회 정책 10개조

    일하는 계층과 부녀자를 먼저 찾을 것, 한글 성경을 쓸 것, 자립할 것 등을 정했다. 한국 교회의 성격을 결정한 문서다.

  5. 1893전해짐

    평양 선교부

    마펫을 중심으로 평양에 자리를 잡았다. 뒷날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릴 도시의 시작이다.

  6. 1894~95사회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

    전쟁과 봉기로 나라가 흔들리는 사이, 사람들은 새로운 가르침에 더 귀를 기울였다.

  7. 1895사회

    곤당골교회의 백정

    백정 박성춘이 양반과 함께 예배한 일로 교회가 갈등을 겪었다. 신분의 벽이 교회 안에서 먼저 흔들린 사건이다.

  8. 1896전해짐

    대구 선교부

    아담스 등이 대구에 자리 잡았고, 뒤에 청라언덕의 선교사 주택과 병원·학교가 여기서 나온다.

  9. 1897사회

    『죠션크리스도인회보』·『그리스도신문』 창간

    한글 신문이 나오면서 교회의 소식과 지식이 글로 퍼지기 시작했다.

  10. 1900전해짐

    신약전서 번역 완료

    선교사와 한국인 번역자들이 함께 작업한 신약 번역이 마무리됐다.

  11. 1901제도

    한국인 첫 감리교 목사 안수

    김창식·김기범이 목사로 안수받았다. 한국인이 목회의 책임을 맡기 시작했다.

사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새뮤얼 마펫

1864–1939Samuel A. Moffett, 마포삼열

평양 선교부·평양신학교

평양을 거점으로 삼아 교회와 학교, 신학교를 세웠다. 한국인 목회자 양성의 뼈대를 놓았다.

한계와 다른 평가

신학 교육에서 보수적 노선을 강하게 밀어 다른 견해를 배제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뒷날 신학 논쟁과 분열의 배경 가운데 하나로 지목된다.

윌리엄 전킨

1865–1908William M. Junkin, 전위렴

남장로교 선교사

군산에서 학교와 병원을 시작했고, 전염병이 도는 마을을 돌다 건강을 잃고 마흔셋에 세상을 떠났다.

한계와 다른 평가

세 아이를 조선에서 잃었다. 선교사의 헌신을 말할 때 그 가족이 치른 대가는 흔히 빠진다.

박성춘

?–1933

백정 출신 장로

천대받던 신분으로 교회에 들어와 장로가 됐고, 신분 철폐 운동에도 목소리를 냈다.

한계와 다른 평가

그의 생애를 전하는 기록은 대부분 선교사 쪽 자료다. 본인의 말로 남은 것은 매우 적다.

박서양

1885–1940

의사·독립운동가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세브란스에서 의학을 배우고 의사가 됐으며, 뒤에 만주에서 병원을 열고 독립운동을 도왔다.

한계와 다른 평가

귀국 후의 행적과 말년에 대해서는 확인된 자료가 많지 않다.

제임스 게일

1863–1937James S. Gale, 기일

선교사·번역가

조선말을 깊이 익혀 『한영자전』을 펴내고 성경 번역에 참여했으며, 『천로역정』을 우리말로 옮기고 우리 옛글을 영어로 소개했다.

한계와 다른 평가

그의 번역과 저술은 조선 문화를 서양에 알렸지만, 그 해석에는 선교사의 눈이 강하게 배어 있다. 성경 번역 방침을 두고 동료들과 오래 다투기도 했다.

호머 헐버트

1863–1949Homer B. Hulbert, 흘법

교사·한국의 벗

육영공원 교사로 들어와 한글로 된 세계지리 교과서 『사민필지』를 썼고, 한글의 우수함을 널리 알렸다. 을사조약 뒤에는 고종의 특사로 국제 사회에 조선의 사정을 호소했다. «웨스트민스터보다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는 말대로 양화진에 잠들었다.

한계와 다른 평가

그는 선교사보다 교육자·언론인으로 활동한 시기가 길었고, 그의 정치 활동은 당시 선교부의 «정치 불개입» 방침과 부딪혔다.

로제타 셔우드 홀

1865–1951Rosetta Sherwood Hall

의료 선교사

여성과 어린이를 위한 병원을 세우고 조선 여성 의사를 길렀으며, 시각장애인을 위한 한글 점자를 만들어 교육을 시작했다. 남편 윌리엄 홀은 청일전쟁 중 환자를 돌보다 세상을 떠났고, 아들 셔우드 홀은 결핵 퇴치를 위해 크리스마스실을 만들었다 — 삼대가 이 땅에서 일했다.

한계와 다른 평가

여성 의료의 문을 연 공은 크지만, 그가 세운 기관들도 서양식 의료를 «문명»으로 놓는 시선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유진 벨

1868–1925Eugene Bell, 배유지

남장로교 선교사·목포·광주

목포와 광주에 선교부를 열고 학교와 병원을 세웠다. 그의 후손들은 오늘까지 북한 결핵 지원 사업을 잇고 있다.

한계와 다른 평가

첫 아내와 둘째 아내를 모두 조선에서 잃었다. 호남 선교의 성과를 말할 때 그 대가는 자주 빠진다.

클레멘트 오웬

1867–1909Clement C. Owen, 오기원

의사·목사·광주

의사이자 목사로 광주와 전남 일대를 돌며 진료하고 전도했다. 순회 중 병을 얻어 마흔둘에 세상을 떠났고, 유가족과 동료들이 그를 기려 오웬기념각을 세웠다.

한계와 다른 평가

그가 맡은 지역이 지나치게 넓었다는 지적이 있다. 적은 인원으로 넓은 땅을 감당하던 초기 선교부의 무리가 그의 죽음에 겹쳐 있다.

윌리엄 베어드

1862–1931William M. Baird, 배위량

선교사·숭실 설립

부산과 대구를 거쳐 평양에 자리 잡고 숭실학교를 세워 대학 과정까지 열었다. 우리말 교과서를 만들고 번역에도 힘썼다.

한계와 다른 평가

그가 세운 학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문을 닫는 길을 택했다. 교육으로 이룬 것이 정치의 힘 앞에서 어떻게 되는지를 그의 학교가 보여 준다.

그때의 기록

남아 있는 자료

1893년 장로회 선교사공의회의 «10개조 정책»은 대상·언어·자립에 대한 방침을 조목으로 적었다. 오늘 한국 교회의 여러 특징이 이 문서에서 설명된다.

장로회 선교사공의회 회의록 · 1893

사경회 보고들은 참석자 수, 걸어온 거리, 스스로 부담한 경비를 적어 두었다. 며칠 치 양식을 지고 수십 리를 걸어온 사람들의 기록이다.

선교사들의 연례 보고 · 1890년대

확인

잘못 알려진 이야기

이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네비우스 방법은 한국에서 처음 만들어진 한국식 선교 정책이다.

확인해 보면

중국에서 일하던 네비우스가 정리한 방법을 한국 선교부가 받아들인 것이다. 다만 그것이 가장 철저하게 적용되고 열매를 낸 곳은 한국이었다.

갈리는 것

견해가 나뉩니다

«스스로 부담하는 교회»는 좋기만 했나

긍정으로 보는 쪽

선교비에 기대지 않았기에 선교사가 떠난 뒤에도 교회가 살아남았고, 한국인 지도자가 일찍 세워졌다.

그늘을 보는 쪽

가난한 신자들에게 부담이 컸고, 헌금과 건축을 신앙의 잣대로 삼는 문화가 이때부터 자리 잡았다고 본다.

현장

이 시대를 볼 수 있는 곳

오늘

나에게 묻는 질문

성경을 읽으려고 글자를 배운 사람들이 있었다. 나에게 성경은 무엇을 배우게 하고 있나?

확인

세 문제

  1. 1네비우스 방법의 세 가지 원리는?

  2. 2농한기에 며칠씩 모여 성경을 배우던 모임은?

  3. 31892년 들어와 호남 선교를 맡은 선교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