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이 온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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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 161903–1910

부흥

부흥수난

나라가 무너지는 동안, 교회에는 왜 불이 붙었나?

  • 1903년 원산에서 선교사 하디가 자기 죄를 공개적으로 자백하면서 부흥이 시작됐다.
  •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교회 사경회에서 회개가 터져 나왔고, 그 불이 전국으로 번졌다.
  • 같은 시기 나라는 을사조약과 군대 해산을 거쳐 1910년 국권을 잃었다.

흐름

무슨 일이 있었나

1903년 여름 원산에서 선교사들의 기도 모임이 열렸다. 그 자리에서 로버트 하디가 자신의 교만과 조선인을 낮추어 본 마음을 사람들 앞에서 자백했다. 회개는 선교사에게서 먼저 시작됐다 — 이것이 한국 부흥사의 중요한 특징이다.

불은 원산에서 서울과 평양으로 옮겨 갔다.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교회의 겨울 사경회, 저녁 집회에서 길선주를 비롯한 사람들이 자기 죄를 공개적으로 자백하기 시작했다. 도둑질, 미움, 간음, 원한 — 사람들은 밤을 새워 울었고, 훔친 물건을 돌려주고 원수를 찾아가 용서를 구했다.

이 부흥은 조직을 바꿔 놓았다. 1907년 평양 장로회신학교가 첫 졸업생 일곱 명을 냈고, 독노회가 조직되어 한국 장로교회가 스스로 목사를 세우는 교회가 됐다. 그리고 그 일곱 명 가운데 이기풍이 제주로 파송됐다 — 받은 지 이십 년 만에 보내는 교회가 된 것이다.

1909년부터는 «백만인을 그리스도께»라는 구호 아래 전국적인 전도 운동이 벌어졌다. 목표한 백만 명은 얻지 못했지만, 이 시기에 교인 수는 크게 늘었다.

밖에서는 나라가 무너지고 있었다. 1905년 을사조약, 1907년 고종 퇴위와 군대 해산, 1910년 한일병합. 부흥과 국망이 같은 몇 해 안에 겹쳐 일어났다. 이 겹침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오늘까지 논쟁거리다.

개념

먼저 정의하고 갑니다

공개적 죄의 자백
1903년 원산과 1907년 평양 집회의 핵심 형식. 회중 앞에서 구체적인 죄를 말하고 배상까지 하는 방식으로, 서구 부흥운동의 형식이 조선의 공동체 문화와 만나 나타난 현상으로 해석된다.
독노회獨老會
1907년 조직된 한국 장로교의 첫 노회. 선교부의 관할에서 벗어나 한국인 목사를 직접 안수할 수 있게 된 제도적 분기점이다. 1912년 총회 조직으로 이어진다.
정교분리
선교사들이 교회에 권고한 원칙. 조선의 정치 상황에 교회가 개입하지 않는다는 방침이었고, 선교부의 미국 본국 이해관계와 무관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있다. 이후 3·1운동과 신사참배 국면에서 되풀이 문제가 된다.

사건

그때 일어난 일

  1. 1903.8부흥

    원산 — 하디의 자백

    선교사 로버트 하디가 기도 모임에서 자신의 교만과 조선인에 대한 편견을 공개적으로 자백했다. 한국 부흥운동의 시작으로 꼽힌다.

  2. 1906부흥

    부흥이 평양으로

    원산의 소식이 전해지며 서울과 평양에서도 회개 집회가 이어졌다.

  3. 1907.1부흥

    평양 대부흥 — 장대현교회 사경회

    겨울 사경회 저녁 집회에서 공개적인 죄의 자백이 터져 나왔다. 길선주와 그레이엄 리가 인도했고, 훔친 것을 돌려주고 원수를 찾아가 용서를 구하는 일이 이어졌다.

  4. 1907.6제도

    평양 장로회신학교 첫 졸업 일곱 사람

    서경조·한석진·양전백·방기창·송인서·길선주·이기풍이 졸업하고 목사가 됐다. 한국인이 목회의 주체가 되는 문이 열렸다.

  5. 1907.9제도

    독노회 조직

    한국 장로교회가 스스로 노회를 조직하고 목사를 안수하는 교회가 됐다.

  6. 1907전해짐

    이기풍, 제주로

    첫 목사 일곱 가운데 이기풍이 제주로 파송됐다. 선교사를 받던 교회가 선교사를 보내기 시작했다.

  7. 1907사회

    군대 해산과 의병

    고종이 물러나고 군대가 해산되면서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교회는 이 흐름과 거리를 두라는 권고를 받기도 했다.

  8. 1909~1910부흥

    백만인구령운동

    «백만인을 그리스도께»를 내걸고 전국 전도 운동이 벌어졌다. 목표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교세는 크게 늘었다.

  9. 1910.8수난

    한일병합

    나라가 주권을 잃었다. 교회는 곧 다른 시험 앞에 서게 된다.

사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로버트 하디

1865–1949Robert A. Hardie, 하리영

캐나다 출신 의료·감리교 선교사

원산에서 자신의 실패와 교만을 공개적으로 자백해 부흥의 물꼬를 텄다.

한계와 다른 평가

부흥이 개인의 회개에 집중되면서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약해졌다는 평가가 그의 노선에도 함께 따라붙는다.

길선주

1869–1935

장대현교회 목사·첫 목사 일곱 중 하나

선도(仙道)를 닦다 회심했고, 새벽기도와 통독을 한국 교회의 습관으로 만든 사람으로 꼽힌다.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에 이름을 올렸다.

한계와 다른 평가

3·1운동 당시 실제 참여의 정도와 이후의 처신을 두고 평가가 갈린다. 부흥운동이 정치 현실에서 교회를 물러서게 했다는 비판도 그의 이름과 함께 논의된다.

그레이엄 리

1861–1916Graham Lee, 이길함

평양 선교사

1907년 1월 장대현교회 집회를 인도하던 중 회개가 터져 나오는 자리에 있었고, 그 밤을 기록으로 남겼다.

한계와 다른 평가

부흥의 기록 대부분이 선교사의 눈으로 쓰였다. 그 자리에 있던 조선 사람들의 목소리는 훨씬 적게 남았다.

김익두

1874–1950

부흥사

장돌뱅이로 살다 회심해 목사가 되었고, 전국을 다니며 부흥회를 인도했다. 병이 나았다는 간증이 잇따르면서 큰 무리가 모였다.

한계와 다른 평가

치유 집회를 둘러싼 과장과 검증 문제가 당대에도 논란이었다. 일제 말기의 처신에 대해서도 평가가 갈리며, 그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해에 세상을 떠났다.

이기풍

1868–1942

한국 교회가 보낸 첫 선교사

평양에서 목사가 되어 제주로 건너가 십오 년 넘게 사역했다. 말이 다르고 문화가 다른 땅에서의 개척이었다.

한계와 다른 평가

말년에 신사참배 문제로 고초를 겪고 세상을 떠났으며, 그 시기의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이 충분치 않다.

그때의 기록

남아 있는 자료

선교사 윌리엄 블레어와 그레이엄 리는 1907년 1월 평양 집회의 밤을 각각 기록으로 남겼다. 자백이 이어지던 시간, 사람들의 울음, 훔친 물건을 돌려주던 장면이 여기 적혀 있다.

W. N. Blair, 『한국의 부흥』 등 선교사 보고 · 1907

장로회 통계는 1907년 전후 교인 수의 급증을 숫자로 보여 준다. 부흥을 «느낌»이 아니라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다.

조선예수교장로회 통계 · 1900년대

확인

잘못 알려진 이야기

이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부흥은 1907년 평양에서 시작됐다.

확인해 보면

시작은 1903년 원산이다. 1907년은 그 불이 가장 크게 타오른 해다.

이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부흥은 조선 사람들의 회개에서 시작됐다.

확인해 보면

먼저 회개한 것은 선교사였다. 하디는 자신의 교만과 조선인을 낮추어 본 마음을 자백했고, 그것을 들은 조선 사람들이 뒤따랐다.

갈리는 것

견해가 나뉩니다

대부흥은 교회를 현실에서 물러서게 했나

그렇다고 보는 쪽

개인의 죄 자백에 집중하면서 나라의 위기에 대한 관심이 옅어졌고, 선교사들이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고 권한 것도 이 흐름을 도왔다고 본다.

그렇지 않다고 보는 쪽

부흥을 겪은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뒤에 3·1운동과 민족운동에 참여했고, 부흥이 만든 조직과 사람이 그 토대가 됐다고 본다.

연구사

학계는 이렇게 읽어 왔습니다

쟁점

1907년 대부흥은 교회를 «비정치화»했는가

그렇다는 쪽

국권 상실기에 회개와 내면으로 관심을 돌려 민족운동에서 교회를 분리시켰다고 본다. 선교사들의 정교분리 권고와 겹쳐 읽으며, 강인철·박정신 등의 연구가 이 계열에 가깝다.

그렇지 않다는 쪽

부흥으로 형성된 조직·인력·헌신이 곧 3·1운동의 기반이 됐다고 본다. 부흥 참여자와 만세운동 참여자의 겹침을 근거로 든다. 옥성득 등이 이 반론을 제시했다.

지금 대체로 합의된 것«부흥이 정치적 효과를 낳지 않았다»는 단정은 지지받지 못한다. 다만 그 효과의 방향과 크기를 두고는 논쟁이 이어진다.

현장

이 시대를 볼 수 있는 곳

오늘

나에게 묻는 질문

그들의 회개는 훔친 물건을 돌려주는 데까지 갔다. 내 회개는 어디까지 가고 있나?

더 읽을 것

이 시대를 더 파려면

  • 옥성득『한반도 대부흥』1903~1907년 사료의 재검토
  • 박용규『평양 대부흥운동』
  • William N. Blair『한국의 부흥(The Korean Pentecost)』당사자 기록. 선교사 시선의 한계를 감안해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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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문제

  1. 11903년 원산에서 먼저 회개한 사람은?

  2. 21907년 대부흥이 일어난 교회는?

  3. 31907년 한국 교회가 제주로 보낸 첫 선교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