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이 온 길
글자 크기
08 / 161910–1919

나라를 잃은 교회

수난

나라가 없어졌을 때, 교회는 무엇이 되었나?

  • 일제는 105인 사건을 꾸며 서북 지역 교회 지도자들을 한꺼번에 잡아들였다.
  • 학교와 병원, 한글과 모임을 가진 교회는 조선인에게 남은 거의 유일한 조직이었다.
  • 1919년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6인이 기독교인이었고, 그해 4월 제암리에서는 예배당이 사람과 함께 불탔다.

흐름

무슨 일이 있었나

병합 직후 총독부는 헌병경찰로 조선을 다스렸다. 집회와 언론이 모두 막혔는데, 교회만은 예배라는 이름으로 사람이 모일 수 있었다. 학교가 있었고, 병원이 있었고, 전국을 잇는 조직과 한글로 된 인쇄물이 있었다. 총독부가 교회를 위험하게 본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1911년, 총독 데라우치를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가 꾸며졌다. 선천과 평양을 중심으로 육백여 명이 잡혀가 고문을 받았고, 1912년 1심에서 105명이 유죄를 받았다. 이듬해 항소심에서 99명이 무죄로 풀려나 여섯 사람만 형이 남았다 — 애초에 없던 사건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사이 서북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미 흩어졌다.

학교에도 손이 뻗쳤다. 사립학교 규칙이 거듭 바뀌면서 성경을 정규 과목으로 가르치는 일이 막혔고, 미션스쿨은 «성경을 가르치되 학교로 인정받지 못할 것인가, 인정을 받되 성경을 뺄 것인가» 사이에서 갈라졌다.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린 서른세 사람 가운데 열여섯이 기독교인이었다. 이승훈이 기독교 쪽을 모았고, 천도교가 자금과 인쇄를 맡았다 — 종교가 다른 사람들이 함께 만든 일이었다. 만세는 전국으로 번졌고, 교회와 미션스쿨이 소식이 오가는 통로가 됐다.

보복은 교회로 향했다. 예배당이 불타고 교인들이 끌려갔다. 4월 15일 경기도 화성 제암리에서는 일본군이 주민들을 예배당에 모아 놓고 문을 잠근 뒤 불을 질렀다. 스물세 사람이 죽었다. 세브란스의 선교사 스코필드가 사흘 뒤 현장에 들어가 사진을 찍었고, 그 사진과 보고서가 국외로 나가면서 세계가 이 일을 알게 됐다.

개념

먼저 정의하고 갑니다

105인 사건
1911년 총독 암살 모의 혐의로 서북 지역 기독교계 인사들을 대량 검거한 사건. 1심에서 105명이 유죄를 받았으나 항소심에서 99명이 무죄로 풀려났다. 신민회 조직을 겨냥한 조작 사건이라는 것이 오늘의 정설이며, 결과적으로 서북 기독교 지도층이 크게 약화됐다.
사립학교규칙
1911년 제정, 1915년 개정으로 미션스쿨의 종교 교육을 규제한 법령. 인가를 받으려면 정규 과목에서 성경을 뺄 것을 요구해, 학교들은 «인가»와 «신앙 교육»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다. 신사참배 국면의 예고편에 해당한다.
민족대표 33인
기독교 16, 천도교 15, 불교 2. 자금과 인쇄는 천도교가 주로 맡았고 기독교 쪽 결집은 이승훈이 담당했다. 종교 간 연합이 이 운동의 조직적 특징이다.

사건

그때 일어난 일

  1. 1911~13수난

    105인 사건

    총독 암살 모의를 꾸며 낸 혐의로 서북 지역 기독교 지도자들이 대거 검거·고문당했다. 1심에서 105명이 유죄를 받았으나 항소심에서 99명이 무죄로 풀려났다.

    출처 · 『105인사건 공판시말서』, 총독부 재판 기록평북 선천 선교부 터
  2. 1911·1915사회

    사립학교 규칙과 성경 교육

    학교 규칙이 거듭 개정되면서 정규 과목으로 성경을 가르치는 일이 막혔다. 미션스쿨은 인가와 신앙 교육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았다.

  3. 1912제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조직

    한국 장로교회가 총회를 조직했고, 그 첫 총회에서 중국 산둥에 선교사를 보내기로 결의했다. 이듬해 세 사람이 떠났다 — 나라를 잃은 해에 밖으로 사람을 보낸 것이다.

  4. 1919.3.1사회

    3·1운동과 민족대표 33인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가운데 기독교 16인, 천도교 15인, 불교 2인이었다. 기독교 쪽은 이승훈이 모았고 인쇄와 자금은 천도교가 맡았다.

  5. 1919.3사회

    전국으로 번진 만세와 교회

    군산 구암동산에서 호남 첫 만세가 일어나는 등, 교회와 기독교 학교가 시위의 거점이 됐다.

  6. 1919.4.15수난

    제암리 학살

    일본군이 주민들을 예배당에 모아 놓고 불을 질러 스물세 사람이 죽었다. 선교사 스코필드가 현장을 사진으로 남겨 세계에 알렸다.

    출처 · 스코필드의 보고와 사진, 『한국의 상황』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
  7. 1919.9사회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기독교인

    상하이에 세워진 임시정부의 초기 인사 가운데 기독교인이 여럿이었다. 교회에서 배운 조직과 회의 방식이 그대로 쓰였다.

사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이승훈

1864–1930남강

오산학교 설립자·민족대표 33인

장사로 재산을 모아 학교를 세웠고,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뒤 3·1운동에서 기독교 쪽을 모았다. 유언대로 그의 유해는 학생들이 볼 수 있게 남겨 달라고 했다.

한계와 다른 평가

그가 세운 오산학교는 뒷날 여러 갈래로 평가된다. 민족운동과 실업, 신앙 사이에서 그가 택한 우선순위를 두고도 견해가 갈린다.

프랭크 스코필드

1889–1970Frank W. Schofield, 석호필

캐나다 출신 의료 선교사·세브란스 교수

제암리와 수촌리에 직접 들어가 사진을 찍고 보고서를 써 국외에 알렸다.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가 불편한 몸이었다.

한계와 다른 평가

그의 활동은 «외국인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했다. 같은 일을 한 조선인은 곧바로 잡혀갔다. 뒷날 그가 남긴 한국 사회에 대한 조언에는 시대의 한계도 함께 담겨 있다.

유관순

1902–1920

이화학당 학생

휴교로 고향에 내려가 아우내 장터의 만세를 이끌었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열여덟에 세상을 떠났다.

한계와 다른 평가

그의 이야기는 해방 뒤 크게 알려지는 과정에서 여러 세부가 덧붙었다. 확인된 기록과 뒤에 만들어진 이야기를 가려 읽어야 한다.

김마리아

1892–1944

교사·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

소래 신앙 집안에서 자라 일본 유학 중 2·8독립선언에 참여했고, 선언서를 몸에 숨겨 들어와 3·1운동을 준비했다. 고문 후유증을 평생 안고 살았다.

한계와 다른 평가

여성 독립운동가의 기록은 남성에 비해 훨씬 적게 남았다. 그의 활동도 재판 기록과 동료의 회고에 크게 기대어 있다.

윤치호

1865–1945

교육자·YMCA 지도자

일찍 유학해 신학문을 배우고 세례를 받았으며, 교육과 청년 운동에서 큰 자리를 차지했다. 105인 사건의 주요 피고로 몰려 옥고를 치렀다.

한계와 다른 평가

그러나 그는 뒷날 일제의 전시 동원에 앞장선 대표적인 인물이 됐다. 억울하게 옥에 갇혔던 사람이 어떻게 협력자가 되었는가 — 그가 육십 년간 쓴 일기가 그 과정을 그대로 보여 준다. 이 앱이 그를 싣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길선주

1869–1935

장대현교회 목사·민족대표 33인

1907년 부흥의 중심에 있었고 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렸다. 재판에서는 증거 부족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한계와 다른 평가

선언서에 서명했으나 그날 탑골에 함께 있지 않았고, 이후 정치 참여에 거리를 두었다. 이를 «신앙에 집중한 선택»으로 보는 시각과 «현실에서 물러선 것»으로 보는 시각이 나뉜다.

그때의 기록

남아 있는 자료

스코필드는 제암리에 다녀온 뒤 현장의 상태와 생존자의 증언을 정리해 국외로 보냈다. 사진과 함께 남은 이 보고서는 사건을 부정하려는 시도에 맞선 가장 강한 자료가 됐다.

F. W. 스코필드의 보고서와 사진 · 1919

105인 사건의 공판 기록에는 «어떻게 자백을 받아 냈는지»가 피고인들의 진술로 남아 있다. 조작된 사건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보여 주는 자료다.

105인사건 공판 기록 · 1912–13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록은 1912년 첫 총회에서 중국 선교사 파송을 결의한 사실을 적고 있다. 나라를 잃은 해의 결정이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록 · 1912

확인

잘못 알려진 이야기

이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3·1운동은 기독교가 주도한 운동이었다.

확인해 보면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기독교가 16인으로 가장 많았지만, 계획과 자금·인쇄의 큰 몫은 천도교가 맡았다. 세 종교가 함께 만든 일이었고, 그 협력 자체가 이 운동의 특징이다.

이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제암리 학살은 오랫동안 감춰졌다.

확인해 보면

사건 직후 스코필드를 비롯한 외국인들이 현장을 확인하고 기록을 남겨 그해에 이미 국외로 알려졌다. 감춰진 것이 아니라, 알려졌음에도 책임을 묻지 못한 것이다.

갈리는 것

견해가 나뉩니다

교회는 만세운동에 나서야 했는가

나서야 했다는 쪽

억눌린 이웃과 함께 서는 것이 신앙의 당연한 자리이며, 실제로 많은 교인이 그렇게 했다고 본다.

신중해야 했다는 쪽

선교사들은 «정치에 관여하면 선교 자체가 막힌다»며 중립을 권했다. 실제로 보복은 교회로 돌아왔다.

연구사

학계는 이렇게 읽어 왔습니다

쟁점

3·1운동에서 기독교의 역할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주도적이었다는 쪽

민족대표 구성과 전국 조직망, 미션스쿨 학생의 참여를 근거로 든다. 한국 교회사 서술의 오랜 자리다.

연합의 한 축이었다는 쪽

기획과 자금에서 천도교의 비중이 컸고, 선교사와 교단 지도부는 오히려 신중론을 폈다는 점을 지적한다. 지역별로 참여 양상이 크게 달랐다는 실증 연구가 뒷받침한다.

지금 대체로 합의된 것«기독교가 주도했다»는 단순화도, «교회는 침묵했다»는 반대 진술도 자료와 맞지 않는다는 점은 대체로 합의된다.

현장

이 시대를 볼 수 있는 곳

오늘

나에게 묻는 질문

그들은 잃은 자리에서 무엇을 지켰나. 나는 지금 무엇을 지키고 있나?

더 읽을 것

이 시대를 더 파려면

  • 윤경로『105인사건과 신민회 연구』
  • 장규식『일제하 한국 기독교민족주의 연구』
  • 이덕주『3·1운동과 제암리사건』 관련 연구

판본과 출판연도는 도서관 목록에서 확인하세요. 이 앱은 확실하지 않은 서지 정보를 적지 않습니다.

확인

세 문제

  1. 1105인 사건의 결말은?

  2. 2민족대표 33인의 종교별 구성은?

  3. 3제암리 학살을 사진과 보고서로 세계에 알린 사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