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고 일하는 신앙
믿음은 사람의 하루를 어떻게 바꾸었나?
- 3·1운동 뒤 교회는 농사와 야학, 협동조합과 절제 운동으로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 여성 교육과 전도부인의 발걸음이 이 시기 교회를 실제로 움직인 힘이었다.
- 동시에 신학의 갈래가 갈라지기 시작했고, 뒤에 올 분열의 씨앗이 여기서 뿌려졌다.
흐름
무슨 일이 있었나
무단통치가 이른바 문화통치로 바뀌면서 숨통이 조금 트였다. 교회는 그 틈에 마을로 들어갔다. YMCA는 농사 개량과 협동조합을 가르쳤고, 교회는 야학을 열어 한글을 가르쳤다. 성경을 읽으려고 글자를 배우던 흐름이 이 시기에 사회 운동으로 자랐다.
절제 운동도 컸다. 술과 담배, 도박과 축첩을 끊자는 운동이 교회를 중심으로 전국에 퍼졌고 여성 단체가 앞장섰다. 가난한 집에서 술값이 사라지는 것은 그 집 아이들의 밥과 직결되는 일이었다 — 이 운동이 왜 그렇게 뜨거웠는지는 거기서 설명된다.
여성의 자리가 크게 달라졌다. 미션스쿨을 나온 여성들이 교사가 되고 의사가 됐다. «전도부인»이라 불린 여성 전도자들은 집집을 돌며 성경을 읽어 주고 아이를 받고 병자를 돌봤다. 목사가 될 수는 없었지만, 교회를 실제로 굴린 것은 이들이었다.
밖에서 자란 만큼 안에서는 부딪혔다.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일 것인가를 두고 논쟁이 시작됐다. 1934년 아빙돈 주석 번역을 둘러싼 다툼은 그 갈래가 이미 벌어졌음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제도 교회 밖에서는 김교신과 동료들이 『성서조선』을 내며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자고 했다.
사건
그때 일어난 일
- 1920년대사회
농촌 계몽과 협동조합
YMCA와 교회가 농사 개량·야학·협동조합 운동을 폈다. 마을에서 교회는 학교이자 상담소였다.
- 1923사회
절제 운동의 확산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를 비롯한 단체들이 금주·금연·축첩 반대 운동을 벌였다. 여성들이 앞장섰다.
- 1920~30년대전해짐
전도부인의 발걸음
여성 전도자들이 집집을 돌며 성경을 읽어 주고 병자를 돌봤다. 이름이 거의 남지 않았지만 교회를 실제로 굴린 사람들이다.
- 1927제도
『성서조선』 창간
김교신과 동료들이 «조선을 성서 위에»를 내걸고 잡지를 냈다. 제도 교회 밖의 신앙 흐름이었다.
- 1932~사회
농촌운동과 기독교 농민학교
배민수 등이 농촌 지도자를 기르는 학교를 열어 농사 기술과 신앙을 함께 가르쳤다.
- 1934제도
아빙돈 주석 사건
번역 출간된 주석의 신학 경향을 두고 총회가 문제를 삼으면서, 성경 해석을 둘러싼 갈래가 드러났다.
- 1935제도
여성 안수 논쟁
여성의 교회 직분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으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교회를 떠받친 사람과 자리를 얻은 사람이 달랐다.
사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김교신
1901–1945교사·『성서조선』 발행인
교사로 일하며 잡지를 내고 성경을 가르쳤다. 교단과 예배당에 기대지 않는 신앙을 주장했고, 해방을 몇 달 앞두고 발진티푸스로 세상을 떠났다.
한계와 다른 평가
제도 교회를 강하게 비판한 그의 자리는 «무교회주의»로 불리며 오랫동안 배척당했다. 그의 주장이 교회를 세우는 데 도움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평가가 갈린다.
조만식
1883–1950오산학교 교장·물산장려운동
«조선 사람 조선 것»을 내걸고 국산품 애용 운동을 이끌었고, 평양에서 교회와 학교, 시민 운동을 함께 이끌어 «조선의 간디»로 불렸다.
한계와 다른 평가
그가 이끈 물산장려운동은 실제 경제 효과가 크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는다. 해방 뒤 북에서 연금되었고 그의 마지막에 대해서는 확인된 기록이 부족하다.
배민수
1897–1968농촌운동가·목사
농민이 스스로 서는 것이 복음의 열매라고 보고 농촌 지도자 양성에 힘썼다.
한계와 다른 평가
그의 농촌운동은 총독부의 정책과 부딪히며 중단됐고, 해방 뒤 다시 시작했으나 산업화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지 못했다.
김활란
1899–1970교육자·이화 교장
여성 교육의 문을 넓혔고 조선 여성 최초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계와 다른 평가
일제 말기에 학병 지원과 전시 동원을 권하는 글과 연설을 남겼다. 여성 교육에 남긴 공과 친일 행적을 함께 놓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 오늘의 평가다.
그때의 기록
남아 있는 자료
『성서조선』은 성경 공부와 함께 농촌과 조선의 현실을 다뤘다. 1942년 「조와(弔蛙)」라는 짧은 글 때문에 잡지가 폐간되고 관련자들이 검거된 일은, 신앙의 언어가 어떻게 저항으로 읽혔는지 보여 준다.
여성 절제회와 각 교회의 보고서에는 금주 서약자 수, 야학 학생 수, 협동조합의 출자금이 숫자로 남아 있다. 신앙 운동이 살림에 닿았음을 보여 주는 기록이다.
확인
잘못 알려진 이야기
이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의 교회는 모두 독립운동을 했다.”
확인해 보면
저항한 이들이 있었지만, 순응하거나 협력한 교회와 지도자도 적지 않았다. 특히 193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그 비중이 커진다. 한쪽만 기억하면 다음 시대의 신사참배를 설명할 수 없다.
갈리는 것
견해가 나뉩니다
교회는 사회를 바꾸는 일에 어디까지 나서야 하는가
삶의 자리로 가야 한다는 쪽
굶주림과 무지를 그대로 둔 채 영혼만 말하는 것은 반쪽이며, 농촌 운동과 절제 운동이 곧 복음의 열매라고 보았다.
복음이 먼저라는 쪽
사회 운동에 힘을 쏟다 보면 교회가 세상 단체와 다를 바 없어지고, 결국 신앙의 중심을 잃는다고 보았다.
현장
이 시대를 볼 수 있는 곳
- 서울YMCA 회관서울 · 학교·병원의 시작1903년 시작된 황성기독교청년회의 맥을 잇는다. 농촌 계몽과 사회 운동의 거점이었다.
- 이화박물관(심슨기념관)서울 · 학교·병원의 시작메리 스크랜턴이 학생 한 명으로 시작한 이화학당의 자리. 여성이 배우기 시작한 곳이다.
- 광주 수피아여학교(수피아 홀)광주·전남 · 학교·병원의 시작1908년 시작된 여학교. 3·1운동과 신사참배 거부의 자취가 남아 있다.
- 목포 정명여학교광주·전남 · 학교·병원의 시작선교사들이 세운 여학교. 독립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의 기록이 남아 있다.
- 부산진일신여학교부산·경남 · 학교·병원의 시작1895년 호주 장로교 선교사들이 세운 여학교. 부산 3·1운동이 여기서 시작됐다.
- 안동교회대구·경북 · 초기 교회 건물1909년 시작된 교회. 유교 전통이 강한 고장에서 교회가 어떻게 자리 잡았는지 보여 준다.
오늘
나에게 묻는 질문
그때 교회는 마을의 학교였고 은행이었다. 오늘 교회는 그 마을에서 무엇인가?
확인
세 문제
11920~30년대 교회의 농촌 운동에 해당하지 않는 것은?
2『성서조선』을 낸 사람은?
3이 시기 교회를 실제로 떠받쳤지만 이름이 거의 남지 않은 이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