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이 온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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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161945–1950

해방, 그리고 갈라짐

부흥수난

해방은 왜 교회에 기쁨만이 아니었나?

  • 북에서는 교회가 통제를 받기 시작했고, 수많은 신앙인이 남으로 내려왔다.
  • 남에서는 신사참배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를 두고 출옥 성도와 기존 지도부가 부딪혔다.
  • 이 다섯 해에 이후 수십 년 분열의 뿌리가 놓였다.

흐름

무슨 일이 있었나

1945년 8월, 감옥 문이 열렸다. 평양 형무소에서 나온 이들을 «출옥 성도»라 불렀다. 그들은 곧 이북5도연합노회에 재건안을 냈다 — 참배한 목회자는 일정 기간 물러나 회개하고, 교회는 죄를 공식으로 인정한 뒤 다시 서자는 내용이었다. 기존 지도부는 «그것은 우리를 정죄하는 것»이라 받아들였다. 옳은 말이 옳게 전해지지 못한 첫 자리였다.

북에서는 다른 압력이 시작됐다. 조만식이 연금됐고, 1946년 11월 3일 선거일이 주일로 잡히면서 교회는 «예배냐 투표냐»의 시험에 들었다. 1946년 기독교도연맹이 만들어져 교회를 체제 안으로 끌어들였고, 이를 거부한 목회자들은 잡혀가거나 남으로 내려왔다. 수만 명이 신앙을 지고 삼팔선을 넘었다.

남으로 내려온 사람들이 서울과 부산에 천막을 치고 교회를 세웠다. 월남한 이들의 교회는 반공의 색이 짙었고, 그것은 그들이 겪은 일에서 나온 것이었다.

남에서도 갈등이 자랐다. 1946년 경남에서 고려신학교가 세워지자 총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서울에서는 조선신학교의 성경 해석을 두고 신학생 오십여 명이 진정서를 내면서 논쟁이 커졌다. 1948년 여수·순천 사건에서는 손양원의 두 아들이 목숨을 잃었고, 그는 아들을 죽인 청년을 양자로 삼았다.

개념

먼저 정의하고 갑니다

교회 재건안
1945년 출옥성도들이 이북5도연합노회에 제출한 안. 참배한 교역자의 일정 기간 자숙과 교회의 공식 회개를 담았다. 내용의 정당성과 관철 방식을 두고 갈등이 시작됐다.
월남 기독교인
북한의 체제 압력을 피해 남으로 내려온 신자들. 이들이 세운 교회가 서울·부산 등지에 다수 생겼고, 반공주의가 한국 개신교의 정치적 성향으로 자리 잡는 데 큰 몫을 했다.
기독교도연맹
1946년 북한에서 조직된 관제 교회 조직. 참여를 거부한 교역자들이 탄압을 받았고, 이 경험이 남한 교회의 북한 인식을 오래 규정했다.

사건

그때 일어난 일

  1. 1945.8제도

    출옥 성도와 교회 재건안

    감옥에서 나온 이들이 참배한 교역자의 자숙과 교회의 공식 회개를 담은 재건안을 냈다. 기존 지도부는 이를 거부했다.

  2. 1946수난

    북한 기독교도연맹 조직

    교회를 체제 안으로 끌어들이는 조직이 만들어졌고, 참여를 거부한 목회자들이 어려움을 겪었다.

  3. 1946.11.3수난

    주일에 잡힌 선거일

    선거일이 주일로 정해지면서 교회가 시험대에 올랐다. 예배를 지킨 교회들이 대가를 치렀다.

  4. 1945~50수난

    월남

    수많은 교인과 목회자가 삼팔선을 넘어 남으로 내려왔다. 서울과 부산에 그들이 세운 교회가 늘었다.

  5. 1946.9제도

    고려신학교 설립

    부산에서 한상동·박윤선을 중심으로 세워졌다. 교회 재건을 앞세운 이 흐름이 뒤에 고신으로 이어진다.

  6. 1947제도

    조선신학교 진정서 사건

    신학생 오십여 명이 성경 해석 문제로 총회에 진정서를 냈다. 신학의 갈래가 공식 문서로 드러난 사건이다.

  7. 1948.10수난

    여수·순천 사건과 손양원의 두 아들

    혼란 속에 손양원의 두 아들이 목숨을 잃었고, 그는 아들을 죽인 청년을 양자로 삼겠다고 했다.

사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박윤선

1905–1988

신학자·성경 주석가

네덜란드와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고려신학교에서 가르쳤으며, 평생에 걸쳐 성경 전권의 주석을 우리말로 썼다.

한계와 다른 평가

그가 몸담은 학교와 교단이 여러 번 바뀌었고, 그때마다 교단 사이에서 그의 선택이 논쟁이 됐다.

김재준

1901–1987

신학자·조선신학교

성경을 역사적 정황 속에서 읽어야 한다고 가르쳤고, 그 때문에 총회와 부딪히다 1953년 목사직에서 면직됐다. 뒤에 한국기독교장로회가 그를 중심으로 섰다.

한계와 다른 평가

그의 신학은 교회를 넓혔다는 평가와 함께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켰다는 비판을 동시에 받는다. 두 평가 모두 오늘까지 살아 있다.

손양원

1902–1950

애양원 목사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지내며 목회했고, 신사참배를 거부해 옥고를 치렀다. 두 아들을 죽인 청년을 양자로 삼았고, 자신도 1950년 가을 총살당했다.

한계와 다른 평가

그의 용서는 개인의 결단이었다. 이를 «모든 피해자가 그래야 한다»는 요구로 옮기면 그 결단의 무게가 오히려 가벼워진다.

조만식

1883–1950

평양의 지도자

해방 뒤 북에서 조선민주당을 만들어 활동하다 신탁통치 반대로 연금됐고, 그 뒤 소식이 끊겼다.

한계와 다른 평가

그의 마지막에 대해서는 확인된 기록이 없다. 여러 증언이 전할 뿐이므로 이 앱은 사망 시기를 단정하지 않는다.

그때의 기록

남아 있는 자료

이북5도연합노회에 제출된 교회 재건안은 참배한 교역자의 자숙 기간과 회개의 절차를 조목으로 적었다. 무엇이 다툼의 씨앗이었는지 이 문서 하나로 보인다.

이북5도연합노회 재건안 · 1945

월남한 교인들이 세운 교회의 창립 기록에는 «어디에서 왔는가»가 적혀 있다. 한 교회의 명부가 곧 실향의 지도다.

월남 교회들의 창립 기록 · 1945~50

확인

잘못 알려진 이야기

이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교단 분열은 신학 차이 때문에 일어났다.

확인해 보면

신학은 여러 원인 가운데 하나다. 신사참배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어느 지역·어느 학교 출신인가, 누가 총회를 이끌 것인가가 함께 얽혀 있었다.

갈리는 것

견해가 나뉩니다

재건안은 옳았는가

옳았다는 쪽

죄를 죄라 부르지 않고 넘어가면 교회는 다시 같은 자리에서 넘어진다고 보았다.

지나쳤다는 쪽

총칼 앞에 굽힌 이들을 감옥에 있던 이들이 심판하는 모양이 되어, 회개가 아니라 분열을 낳았다고 보았다.

연구사

학계는 이렇게 읽어 왔습니다

쟁점

해방 직후 갈등을 «신학 갈등»으로 볼 수 있는가

신학이 핵심이라는 쪽

성경관과 교회론의 차이가 이후 교단 분열의 축이었다고 본다.

권력·지역·경험이 핵심이라는 쪽

신사참배 처리, 월남민과 재남 교인의 관계, 교단 주도권 다툼이 신학 언어로 표현된 것이라고 본다.

현장

이 시대를 볼 수 있는 곳

오늘

나에게 묻는 질문

옳은 말이 옳은 방식으로 전해지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기는가?

더 읽을 것

이 시대를 더 파려면

  • 강인철『한국 기독교회와 국가·시민사회』해방 이후 정치·사회사적 분석
  • 김흥수『해방 후 북한교회사』 관련 연구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한국 기독교의 역사』 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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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문제

  1. 1«출옥 성도»가 낸 재건안의 핵심은?

  2. 21946년 북한에서 교회가 겪은 시험은?

  3. 3손양원 목사가 두 아들을 잃은 사건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