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이 온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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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161950–1953

피로 쓴 삼 년

수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전쟁터에서 무엇이 되는가?

  • 전쟁 중 목회자와 교인들이 집단으로 목숨을 잃었고, 서남해 지역의 피해가 특히 컸다.
  • 손양원은 두 아들을 죽인 사람을 아들로 삼았고, 자신도 그해 가을 총살당했다.
  • 문준경은 피할 수 있었으나 섬으로 돌아갔다가 죽었다.

흐름

무슨 일이 있었나

1950년 6월, 전쟁이 터졌다. 서울에 남아 있던 목회자와 교계 인사들이 여름 사이 붙잡혀 북으로 끌려갔다. 양주삼·송창근·남궁혁처럼 한국 교회의 기둥이던 이들이 이때 사라졌고, 대부분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았다.

가을에 전세가 뒤집히자 후퇴하던 쪽이 마을마다 사람을 죽였다. 교회는 표적이 되기 쉬웠다. 전라남도 영광의 염산교회와 야월교회에서는 교인들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다 — 한국 교회 최대 규모의 집단 순교로 꼽힌다. 바다에 돌을 매달아 던졌다는 증언이 남아 있다.

9월 28일 여수에서 손양원이 총살당했다. 그는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살던 애양원을 떠나지 않았다. 열흘 뒤인 10월 5일, 문준경은 증도로 돌아갔다가 붙잡혀 죽었다. 섬을 걸어 다니느라 일 년에 고무신 아홉 켤레를 닳렸다는 그 전도사였다.

살아남은 교회는 부산과 대구로 내려가 천막을 쳤다. 피란민에게 밥을 나누고 고아를 거뒀다. 미국 교회에서 온 구호 물자가 그 손을 통해 흘렀다. 1951년에는 군종 제도가 시작돼 목사들이 전선으로 들어갔다.

순교자는 목사만이 아니었다. 전도사와 장로, 이름이 남지 않은 교인과 아이들이 훨씬 많았다. 자료마다 수가 다르므로 이 앱은 확인된 명단이 있는 곳에서만 수를 적는다.

개념

먼저 정의하고 갑니다

납북
1950년 여름 서울 점령기에 교계 인사들이 북으로 끌려간 일. 양주삼·송창근·남궁혁 등 교단 지도층이 포함됐고, 대부분 생사가 확인되지 않았다. 지도부 공백이 이후 교회 재편에 영향을 미쳤다.
집단 순교
한 교회의 다수 교인이 함께 목숨을 잃은 사건. 영광 염산·야월교회가 대표적이다. 희생자 수는 자료마다 차이가 있어, 명단이 확인된 자료를 기준으로 삼는 것이 원칙이다.
군종제도
1951년 시작된 군대 내 종교 활동 제도. 젊은 남성 인구가 교회와 대규모로 접촉하는 통로가 되어 전후 성장의 한 축을 이뤘다.

사건

그때 일어난 일

  1. 1950.7~9수난

    교계 인사 납북

    서울에 남아 있던 목회자와 교계 지도자들이 붙잡혀 북으로 끌려갔다. 대부분 생사가 확인되지 않았다.

  2. 1950.9.28수난

    손양원 순교

    여수에서 총살당했다. 그는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살던 애양원을 떠나지 않았다.

  3. 1950.10.5수난

    문준경 순교

    피할 수 있었으나 증도로 돌아갔다가 체포되어 죽었다. 섬을 걸어 다니며 교회를 세운 전도사였다.

  4. 1950 가을수난

    영광 염산교회·야월교회 집단 순교

    두 교회에서 교인들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다. 각 교회의 순교기념관에 이름이 정리되어 있다.

  5. 1951제도

    군종 제도 시작

    군대에 목사와 신부가 들어가는 제도가 마련됐다. 전선의 젊은이들에게 신앙이 닿는 통로가 됐다.

  6. 1951~53사회

    피란 교회와 구호

    부산·대구로 내려온 교회들이 천막에서 예배하고 피란민을 먹이고 고아를 거뒀다.

사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문준경

1891–1950

전도사·신안 증도

혼인에 실패하고 홀로 지내다 신앙을 갖고 전도사가 되어, 배와 걸음으로 섬들을 돌며 교회를 여럿 세웠다. 피란을 권유받았으나 «내 양들이 있다»며 증도로 돌아갔다가 붙잡혀 죽었다.

한계와 다른 평가

그의 생애 대부분은 제자와 마을 사람들의 증언으로 전해진다. 널리 알려진 «고무신 아홉 켤레» 같은 이야기도 전승이므로, 확인된 사실과 나누어 읽는 것이 옳다.

양주삼

1879–1950?

감리교 총리사

한국 감리교의 첫 총리사를 지냈고, 전쟁 중 서울에서 붙잡혀 북으로 끌려갔다.

한계와 다른 평가

일제 말기에 전시 협력에 이름을 올린 기록이 남아 있다. 납북이라는 비극과 그 이전의 행적을 함께 보아야 한다.

송창근

1898–1950?

신학자·목사

빈민과 함께하는 목회를 강조했고 조선신학교를 이끌었다. 전쟁 중 납북되어 소식이 끊겼다.

한계와 다른 평가

그의 신학과 교육 방향은 뒷날 교단 갈등의 한 축이 됐고, 남은 자료가 적어 평가가 엇갈린다.

그때의 기록

남아 있는 자료

각 교회의 순교기념관과 교단 조사 자료에는 희생자의 이름·나이·죽은 자리가 정리되어 있다. 숫자가 아니라 이름으로 남기려는 노력이 여기에 있다.

염산교회·야월교회 순교기념관, 교단 조사 · 1950~

피란 시기 교회들의 주보와 보고서에는 천막 예배의 참석자 수, 나눠 준 구호 물자의 양이 적혀 있다. 신앙이 밥과 함께 움직인 시간이다.

피란 교회 주보·구호 보고 · 1951–53

확인

잘못 알려진 이야기

이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전쟁 중 순교자는 대부분 목사였다.

확인해 보면

확인된 명단을 보면 전도사와 장로, 평신도와 아이들이 훨씬 많다. 이름이 남지 않은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사실 자체가 이 시기의 성격을 말해 준다.

이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순교자 수는 정확히 알려져 있다.

확인해 보면

자료마다 크게 다르다. 교단·기념관·연구자의 집계가 서로 어긋나므로 이 앱은 명단이 확인된 곳에서만 수를 적고, 그 밖에는 범위로 표시한다.

연구사

학계는 이렇게 읽어 왔습니다

쟁점

전쟁 경험은 한국 개신교에 무엇을 남겼는가

반공주의의 내면화로 보는 쪽

순교 경험과 월남민의 기억이 결합해 반공이 신앙의 일부가 됐다고 본다. 강인철 등의 연구가 이 계열이다.

구호·성장의 계기로 보는 쪽

교회가 구호와 교육의 그물이 되면서 사회적 신뢰를 얻었고, 이것이 1950년대 급성장의 토대가 됐다고 본다.

지금 대체로 합의된 것두 흐름이 함께 작동했다는 것이 오늘의 대체적 이해다.

현장

이 시대를 볼 수 있는 곳

오늘

나에게 묻는 질문

용서는 감정이 아니라 결단이었다. 내가 미루고 있는 결단은 무엇인가?

더 읽을 것

이 시대를 더 파려면

  • 김흥수『한국전쟁과 기복신앙 확산 연구』
  • 강인철『한국의 개신교와 반공주의』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한국 기독교의 역사』 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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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문제

  1. 1손양원 목사가 목회하던 곳은?

  2. 2문준경 전도사가 죽은 곳은?

  3. 3한국 교회 최대 규모의 집단 순교가 일어난 지역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