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이 온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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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161953–1969

잿더미 위에서

부흥수난

다시 세우는 일과 갈라서는 일이 왜 함께 일어났나?

  • 구호 물자와 함께 교회가 빠르게 늘어 시골마다 예배당이 섰다.
  • 같은 기간 장로교는 세 번 갈라졌다 — 1952년, 1953년, 1959년.
  • 라디오 방송과 군선교가 시작되면서 복음이 닿는 길은 오히려 넓어졌다.

흐름

무슨 일이 있었나

전쟁이 멈추자 교회는 잿더미 위에서 다시 세워졌다. 미국 교회의 구호 물자가 교회를 통해 나뉘었고, 밀가루와 옷을 받으러 왔다가 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을 두고 «밀가루 신자»라는 말이 돌았지만, 그 가운데 상당수가 평생의 신자가 됐다.

성장은 뚜렷했다.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에게 교회는 예배와 함께 위로와 일자리, 아이의 학교를 주었다. 1950년대의 교인 증가율은 뒤의 어느 시기보다 높았다.

그러나 같은 기간에 장로교는 세 번 갈라졌다. 1952년, 신사참배 문제의 처리를 두고 고신 계열이 나뉘었다. 1953년에는 성경 해석과 신학 교육을 두고 김재준이 면직되면서 기독교장로회가 섰다. 1959년에는 세계교회협의회 가입 문제를 두고 통합과 합동으로 갈렸다. 오늘 한국 장로교 지형의 뼈대가 이 세 번에서 나왔다.

갈라선 만큼 신학교가 늘고 교단마다 선교와 방송을 따로 시작했다. 1954년 기독교방송, 1956년 극동방송이 문을 열어 전파를 타고 복음이 나갔다. 군종 제도를 통해 젊은이들이 군대에서 신앙을 만났다. 1961년에는 개역한글판 성경전서가 나와 이후 수십 년 동안 한국 교회의 공용 성경이 됐다.

사회 문제 앞에서는 조용했다. 1960년 4·19 때 교회는 대체로 말이 없었고, 1965년 한일협정을 두고서야 반대 목소리가 조직됐다. 다음 시대에 교회가 두 갈래로 갈리는 흐름의 시작이 여기에 있다.

개념

먼저 정의하고 갑니다

에큐메니컬 논쟁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과 교회 연합운동을 둘러싼 갈등. 1959년 예장이 통합·합동으로 갈라진 직접적 쟁점이었고, 신학 노선과 국제 관계 인식이 함께 걸려 있었다.
구호와 교회 성장
미국 교회와 기독교세계봉사회 등을 통해 들어온 원조 물자가 교회를 통해 분배되면서 교회 접촉면이 넓어진 현상. «밀가루 신자»라는 말이 그 시대의 자조적 표현이다.
교단 분열의 세 국면
1952년 고신(신사참배 처리), 1953년 기장(성경관·신학교육), 1959년 예장 통합·합동(WCC). 오늘 한국 장로교 지형의 뼈대가 이 세 번에서 형성됐다.

사건

그때 일어난 일

  1. 1952제도

    고신 계열의 분리

    신사참배 문제의 처리와 교회 재건 방식을 두고 갈라섰다.

  2. 1953제도

    기독교장로회의 분리

    김재준이 면직되면서 성경 해석과 신학 교육을 둘러싼 갈래가 교단으로 굳어졌다.

  3. 1954·1956전해짐

    기독교방송과 극동방송

    라디오 방송이 시작되면서 예배당 밖으로 복음이 나갔다. 글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닿는 길이었다.

  4. 1959제도

    예장 통합·합동 분열

    세계교회협의회 가입 문제 등을 두고 갈라졌다. 오늘 한국 장로교 지형의 뼈대가 여기서 나왔다.

  5. 1950년대부흥

    구호와 교회 성장

    구호 물자가 교회를 통해 나뉘었고 시골마다 예배당이 섰다. 증가율은 뒤의 어느 시기보다 높았다.

  6. 1961전해짐

    개역한글판 성경전서

    이후 수십 년 동안 한국 교회가 함께 읽은 성경이 나왔다.

  7. 1965사회

    한일협정 반대

    교계에서 조직적인 반대 목소리가 나왔다. 사회 문제에 교회가 목소리를 낸 이른 사례다.

사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한경직

1902–2000

영락교회 목사

월남한 신자들과 함께 서울에 교회를 세워 구호와 교육, 사회사업을 폈다. 1992년 템플턴상을 받는 자리에서 자신이 신사참배에 참여했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회개했다.

한계와 다른 평가

그의 공개 회개는 높이 평가받지만, 왜 그토록 오래 걸렸는가라는 물음도 함께 남는다. 강한 반공 노선이 교회와 정치의 거리를 좁혔다는 비판도 있다.

박형룡

1897–1978

신학자

보수 신학의 틀을 세우고 신학교를 이끌었으며, 그의 노선이 오늘 여러 교단 신학의 바탕이 됐다.

한계와 다른 평가

다른 견해를 교회 밖으로 미는 방식이 분열을 굳혔다는 비판을 받는다. 신학교 부지 문제로 겪은 논란도 그의 이력에 남아 있다.

김활란·박에스더 세대의 여성 지도자들

교육·구호

전쟁 뒤 고아원과 학교, 여성 단체를 이끌며 무너진 사회를 떠받쳤다.

한계와 다른 평가

이 세대 여성 지도자 다수가 일제 말기의 협력 문제를 함께 안고 있다. 공과를 나누어 보되 지우지는 않는 것이 오늘의 태도다.

그때의 기록

남아 있는 자료

각 교단의 총회록에는 분열이 결정된 회의의 발언과 표결이 남아 있다. «무엇을 두고 갈라섰는가»를 확인하려면 이 기록을 봐야 한다.

각 교단 총회록 · 1952·1953·1959

기독교세계봉사회 등 구호 기관의 보고서에는 나눠 준 물자의 양과 지역이 적혀 있다. 교회가 어떻게 사회의 그물이 되었는지 보인다.

구호 기관 보고 · 1950년대

확인

잘못 알려진 이야기

이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폭발적 성장은 1970년대에 시작됐다.

확인해 보면

증가율만 놓고 보면 1950년대가 더 가파르다. 1970년대는 «큰 교회»가 눈에 띄기 시작한 시기이지, 성장이 시작된 시기는 아니다.

이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교단 분열은 신학 논쟁의 결과다.

확인해 보면

신사참배 처리, 지역과 학연, 총회 주도권이 함께 얽혀 있었다. 신학만으로 설명하면 왜 그렇게 감정이 격했는지가 설명되지 않는다.

갈리는 것

견해가 나뉩니다

세계교회협의회 가입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함께해야 한다는 쪽

세계 교회와 협력하며 배우고 도와야 하며, 고립은 교회를 좁게 만든다고 보았다.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쪽

신학 노선이 다른 교회와 한자리에 서면 복음의 내용이 흐려진다고 보았다.

연구사

학계는 이렇게 읽어 왔습니다

쟁점

1950년대 성장을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신앙 운동의 결과로 보는 쪽

전쟁의 참상 뒤 종교적 물음이 커졌고 부흥운동이 이어졌다는 설명이다.

사회 조건으로 설명하는 쪽

원조 경제, 피란과 이동으로 흩어진 공동체, 국가의 반공 정책과 교회의 친화성 등을 든다. 증가율이 1970년대보다 높았다는 통계가 이 논의의 출발점이다.

현장

이 시대를 볼 수 있는 곳

오늘

나에게 묻는 질문

나뉜 이유를 아는 것과, 나뉜 채로 사는 것은 다르다. 오늘 우리는 어디에 있나?

더 읽을 것

이 시대를 더 파려면

  • 강인철『한국 기독교회와 국가·시민사회』
  • 김명배『해방 후 한국 기독교 사회운동사』 관련 연구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한국 기독교의 역사』 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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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

세 문제

  1. 11959년 예장이 통합과 합동으로 갈린 주요 쟁점은?

  2. 21961년에 나와 수십 년 동안 한국 교회가 함께 읽은 성경은?

  3. 31950년대 교회 성장에 대한 설명으로 맞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