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갈래의 성장
같은 시대에 왜 그렇게 다른 두 교회가 있었나?
- 여의도에 백만 명이 모이는 집회가 열리고 세계에서 손꼽히는 큰 교회들이 생겨났다.
- 다른 한쪽에서는 공장과 법정, 거리에 교회가 있었다.
- 성장과 저항 — 이 시대를 한 갈래로만 기억하면 절반을 잃는다.
흐름
무슨 일이 있었나
산업화로 사람들이 도시로 몰렸다. 고향을 떠나 낯선 도시에 선 사람들에게 교회는 사람을 만나고 위로를 얻는 자리였다. 서울 변두리마다 교회가 섰고, 그 가운데 몇은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가 됐다.
대규모 집회의 시대이기도 했다. 1973년 빌리 그레이엄 서울 집회의 마지막 날 여의도 광장에는 주최 측 집계로 백만 명이 넘게 모였다. 이듬해 엑스플로 74, 1977년과 1980년의 민족복음화 대성회가 이어졌다. 사람들이 광장을 가득 메운 사진이 이 시대의 상징이 됐다.
그러나 같은 시기, 다른 곳에도 교회가 있었다. 1970년 전태일이 스스로 몸을 불사른 뒤 노동 문제가 드러났고, 영등포산업선교회를 비롯한 산업선교가 공장 노동자와 함께 섰다. 1973년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유신을 비판하는 유인물이 뿌려져 목사들이 구속됐고, 1976년 명동성당의 3·1 민주구국선언에도 개신교 인사들이 함께했다.
1980년 광주에서 교회는 시민과 함께 있기도 했고 침묵하기도 했다. 1987년 6월, 박종철과 이한열의 죽음 앞에서 명동성당과 여러 교회가 사람들을 품었다. 같은 해에 다른 편에서는 대형 집회가 이어졌다.
이 시대를 «성장의 시대»로만 기억하면 공장과 법정에 있던 교회가 지워지고, «저항의 시대»로만 기억하면 도시로 올라온 사람들을 품은 수많은 작은 교회가 지워진다. 두 갈래가 같은 시간에 흘렀다는 것이 사실이다.
개념
먼저 정의하고 갑니다
- 교회성장론
- 1970년대 도입된 선교학 이론(맥가브란 계열). 전도 방법과 조직을 성장 지표로 관리하는 접근이며, 대형 집회와 제자훈련 프로그램의 이론적 배경이 됐다.
- 산업선교
- 공장 노동자와 함께 일하며 노동조합·소모임을 도운 활동. 영등포산업선교회가 대표적이다. «용공» 공격을 받았고 교계 내부에서도 지지와 반대가 갈렸다.
- 민중신학
- 1970년대 한국에서 형성된 신학. 억눌린 «민중»을 성서 해석의 주체로 놓았고, 서구에 한국 신학으로 소개된 드문 사례다. 안병무·서남동 등이 대표적이다.
- 국가조찬기도회
- 1966년 시작된 정례 행사. 교회와 정치권력의 관계를 보여 주는 상징으로, 같은 시기 인권운동과 나란히 놓고 읽어야 이 시대가 설명된다.
사건
그때 일어난 일
- 1970.11사회
전태일과 노동 문제
전태일의 죽음 이후 노동 현실이 드러나면서 산업선교가 본격화됐다.
- 1973.5부흥
빌리 그레이엄 서울 집회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마지막 집회에 주최 측 집계로 백만 명이 넘게 모였다.
- 1973.4수난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
유신 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이 뿌려져 목회자들이 구속됐다. 교회가 정치 사건의 자리에 선 이른 사례다.
- 1974부흥
엑스플로 74
전도 훈련과 대규모 집회가 결합된 행사가 열려 수십만 명이 참여했다.
- 1970년대사회
산업선교와 도시빈민 선교
영등포산업선교회 등이 노동자와 함께 일하며 노동조합과 야학을 도왔다. «교회가 왜 공장에 있느냐»는 비판도 함께 받았다.
- 1976.3사회
3·1 민주구국선언
명동성당에서 발표된 선언에 개신교·천주교 인사들이 함께 이름을 올렸다.
- 1980.5수난
광주
광주에서 교회는 시민과 함께 있기도 했고, 침묵하기도 했다. 이 시기의 기억은 교단마다 다르게 남아 있다.
- 1987.6사회
6월 항쟁과 교회
박종철·이한열의 죽음 앞에서 여러 교회와 성당이 시민들을 품었다.
사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박형규
1923–2016목사·인권운동
남산 부활절 사건으로 구속된 뒤 여러 차례 감옥을 오가며 도시빈민·인권 운동에 섰다.
한계와 다른 평가
그의 활동을 «정치 목사»라 비판하는 시각이 교계 안에 컸고, 그 갈등은 지금도 이어진다.
조지송
1933–2019영등포산업선교회 목사
한국 첫 산업선교 목사로 공장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며 노동조합과 소모임을 도왔다.
한계와 다른 평가
산업선교는 «용공»이라는 공격을 받았고, 교계 안에서도 지지와 반대가 갈렸다. 노동 현장의 변화에 실제로 얼마나 기여했는지에 대해서도 평가가 나뉜다.
함석헌
1901–1989사상가·『씨알의 소리』
무교회 전통에서 출발해 «씨알»이라는 말로 보통 사람의 힘을 말했고, 독재에 맞선 글을 계속 썼다.
한계와 다른 평가
그의 사상은 제도 교회와 거리가 멀어 오랫동안 교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개인사에 대한 비판도 남아 있다.
조용기
1936–2021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
천막에서 시작한 교회를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로 키웠고, 가난과 병에서 벗어나는 희망을 설교했다. 그 메시지는 도시로 올라온 사람들에게 크게 닿았다.
한계와 다른 평가
번영을 강조한 설교가 신앙을 얄팍하게 만들었다는 비판을 오래 받았고, 말년에는 교회 자금과 관련한 재판에서 유죄가 확정됐다. 이 사실을 빼고 그의 시대를 설명할 수 없다.
그때의 기록
남아 있는 자료
1973년 집회의 기록 사진과 주최 측 집계는 이 시대의 규모를 보여 준다. 다만 인원 집계는 주최 측 발표이므로 그대로 사실로 옮기기보다 «주최 측 집계»로 적는 것이 옳다.
영등포산업선교회의 활동 기록과 재판 자료에는 노동자들의 증언이 남아 있다. 같은 시기 교회의 다른 얼굴을 보여 주는 자료다.
확인
잘못 알려진 이야기
이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확인해 보면
일부 교회와 개인이 앞에 섰지만, 교계 전체로 보면 침묵하거나 정권 쪽에 선 경우가 더 많았다. 국가조찬기도회는 그 시기에도 이어졌다.
이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민주화에 무관심했다.”
확인해 보면
이 역시 사실이 아니다. 감옥에 간 목회자와 공장에 들어간 전도사들이 실제로 있었다. 두 진술 모두 절반씩 맞고, 절반씩 틀리다.
갈리는 것
견해가 나뉩니다
교회의 급성장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은혜의 시대로 보는 쪽
가난과 혼란 속에서 수많은 사람이 복음을 만났고, 그 열매가 오늘 한국 교회의 바탕이 됐다고 본다.
성장주의로 보는 쪽
숫자와 건물이 목표가 되면서 교회가 세상의 성공 방식을 그대로 들여왔고, 오늘의 신뢰 문제가 그때 시작됐다고 본다.
연구사
학계는 이렇게 읽어 왔습니다
쟁점
1970~80년대 교회를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
성장의 시대로 보는 쪽
도시화·이농과 맞물린 폭발적 성장, 세계적 규모의 교회 등장을 중심에 놓는다.
저항의 시대로 보는 쪽
산업선교·인권운동·민중신학을 중심에 놓는다. 다만 이 흐름에 참여한 교회는 수적으로 소수였다.
지금 대체로 합의된 것 — 두 흐름을 한 시대의 두 얼굴로 함께 서술하는 것이 오늘의 표준적 접근이다.
현장
이 시대를 볼 수 있는 곳
오늘
나에게 묻는 질문
내가 아는 «그때 교회»는 어느 쪽인가? 다른 쪽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나?
더 읽을 것
이 시대를 더 파려면
- 강인철『한국 기독교회와 국가·시민사회』
- 김진호 외한국 개신교 대형교회 연구성장의 사회적 조건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한국 기독교의 역사』 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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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문제
11973년 여의도에서 열린 대규모 집회를 인도한 사람은?
21970년대 산업선교가 활동한 자리는?
3이 시대를 바르게 설명한 것은?